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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555
한자 明洞書社所藏懸板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귀일길 39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장처 명동 서사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 1048지도보기
성격 현판
재질 나무
소유자 명동 서사[박흥상]
관리자 명동 서사[박흥상]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 명동 서사에 소장된 현판 일괄.

[개설]

명동 서사에 소장 현판은 「명동 서사(明洞 書社)」, 「명동 실기(明洞 實記)」, 「서명동실기후(書明洞實記後)」, 「명동사상량문(明洞祠上梁文)」, 「존경재(存敬齋)」, 「보의재(輔義齋)」, 「백록동규약(白鹿洞規約)」, 「귀일고거(帰一古㞐)」의 8점이다. 이들 현판은 명동 서사 건립 당시와 그 이전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명동 서사는 1858년(철종 9) 처음 건립 시에는 병재 박하징을 제향하는 사우로서 ‘명동사(明洞祠)’라 불렸다. 하지만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후 강당만이 남게 되자 ‘명동 서사’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최초에 문중 사우로 건립된 명동사는 현전하는 기록이 미비하여 상세한 규모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남아 있는 현판을 통해서 짐작해 보면 당시에 사당과 강당 및 숙실을 갖춘 외형상 서원의 형태로 존치(存置)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흔적은 「존경재(存敬齋)」, 「보의재(輔義齋)」, 「백록동 규약(白鹿洞規約)」 등에서 짐작이 된다. 「명동 서사」 편액은 1868년 명동사 훼철 이후 재건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귀일고거(歸一古居)」 편액은 명동 서사가 있는 곳이 ‘귀일 마을’이기에, 이 귀일 마을에서 오래전부터 밀양 박씨 일족들이 살아 왔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작성 연대는 알 수 없다.

「명동사 상량문」 편액의 글은 이종상이 1857년에 지은 것이며, 「명동실기」 편액은 명동사의 훼철 이후 후손들이 다시 서원을 건립하여 박하징을 제향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후손 박기경이 집안에 전해오던 박하징의 글과 제현(諸賢)들과 왕래한 글들을 모아서 1책의 『명동실기(明洞實記)』로 엮은 경위를 1897년에 판목에 새긴 것이다. 이어 1899년에는 당시의 이름난 학자였던 이종기에게 ‘서명동실기후’라는 글을 받음으로써 『명동실기』 편찬의 당위성을 명확히 하였는데, 이 내용 또한 판목에 새겨 강당에 걸어 두었다.

[형태]

강당 정면에 걸려 있는 「명동 서사(明洞 書社)」[가로 194㎝, 세로 65㎝] 현판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쓰여 있다.

박기경(朴箕璟)이 1897년(광무 1)에 지은 「명동실기(明洞實記)」[가로 122㎝, 세로 35㎝] 편액과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1837∼1902]가 1899년(광무 3)에 지은 「서명동실기후(書明洞實記後)」[가로 108.3㎝, 세로 38.1㎝] 편액,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1799∼1870]이 1857년(철종 8)에 지은 「명동사 상량문(明洞祠上梁文)」[가로 138.3㎝, 세로 38.3㎝] 편액은 다른 편액과는 달리 테두리를 칠하지 않았다.

「존경재(存敬齋)」[가로 94㎝, 세로 41㎝] 현판은 테두리 아래와 좌우에 장식이 온전히 남아 있다.

「보의재(輔義齋)」[가로 99.5㎝, 세로 41.5㎝] 현판은 내부와 테두리를 모두 검게 칠하고 있다.

「백록동 규약(白鹿洞規約)」[가로 95.5㎝, 세로 30.8㎝] 편액은 테두리가 없다.

「귀일고거(帰一古㞐)」[가로 113.5㎝, 세로 39.3㎝] 현판은 테두리가 없으며, 글자 중 귀(帰)와 거(㞐)자는 귀(歸), 거(居)자의 이형자를 사용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명동 서사 소장 현판 은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지만, 명동 서사의 역사에 대하여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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