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3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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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抗日義兵戰爭 |
영어공식명칭 | The Civilian Army Activities of Hamyang County Area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개항기에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목적으로 진행된 의병의 활동.
[역사적 배경]
경상남도의 의병 활동은 민족의 독립을 수호하려는 의도에서 주민·지식인·유생·농민 등이 합세하여 지리산을 중심으로 꾸준하고 지속적인 항일 투쟁을 진행한 점이 특기할 만한 것이다. 지리산과 덕유산을 왕래하며 전개된 서부경남의 의병은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경상남도의 대표적 의병전이었으며, 노응규·문태수·유명국·이학로·손기혁·권석도·김동신 등은 전국을 대표할 만한 의병장들이었다.
[경과]
함양군을 비롯한 경상남도의 의병들은 주로 서부인 지리산을 중심으로 유생들이 주도하여 활약하였으며, 동부지역에서는 활동이 미미하였다. 초기 의병은 함양군 안의면·경상남도 산청군·함양군 등지에서 항일 의병 전쟁을 전개하였으나, 중기에는 산발적인 활동 때문에 존재성이 미약해 보인다. 그러나 후기 의병은 알려진 의병장 수만 50여 명이며 의병 수는 1907년에 4,500여 명, 1908년에 4,000여 명, 1909년에 1,800여 명에 이른다.
[안의면 물삼거리 전투]
함양군에서의 대표적인 의병활동의 예로는 문태서 의병장의 활동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전투가 ‘안의면 물삼거리 전투’이다. 1907년 10월 7일에 문태서가 30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함양군 안의면 장수사에서 내려와 진행한 작전이다. 먼저 박춘실이 20여 명을 인솔하고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봉동리에 있는 동촌마을에 내려가 난동을 부려 마을 사람이 안의 헌병대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보고를 들은 안의 헌병 30여 명이 출동하여 달아나는 의병을 뒤쫓아 갔으나, 문태서의 작전으로 물삼거리에 300여 명의 의병이 4개조로 나누어 매복해 있다가 추격해 오던 헌병을 사방에서 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안의헌병대 무기탈취사건]
또 다른 함양군의 의병활동으로는 ‘안의 헌병대 무기탈취사건’이 있다. 1908년 여름, 함양군 안의면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헌병분견대를 공격하기 위해 문태서 의병장은 7명의 동료들과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헌병대 정탐을 위해 안의면으로 사람을 보낸다. 문태서 의병장은 며칠간 머물면서 함양군 안의면의 헌병대 내부 사정을 샅샅이 정탐하였다. 헌병대의 내부 동태 및 헌병분견소의 구조, 무기관리 상태와 보관 장소 등을 파악하였으며 헌병대 근처의 도로망과 퇴로를 상세히 조사하였다. 또한 아군의 전세가 불리할 시를 대비해 은신처를 마련해 놓기도 하였다. 정탐 내용을 근거로 작전 시간은 하루 중에서 점심시간으로 정하였다. 부대원들이 점심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몰려간 틈을 타서 침입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서 모두 식당으로 몰려가고, 사무실은 당번 한 사람만 지키고 있었다. 그때 힘센 의병 한 사람이 정문으로 들어가 헌병대에 신고하러 왔다고 하면서 가까이 접근하여 소리도 없이 헌병을 때려눕혔고, 대기하고 있는 다른 의병들이 실탄을 탈취하였다. 당시 탈취한 물품은 일본군의 최신무기인 소총 10여 정과 실탄 등이었다. 일본군은 뒤늦게 알고 의병의 퇴로를 차단한 뒤 뒤쫓았으나 달아난 의병들을 검거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1911년 8월 17일에 문태서는 고향에 성묘하려고 왔다가 밀정의 신고로 조산천 주막에서 체포되었다. 문태서 의병장은 진주와 대구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수감되었고 1913년 2월 4일 34세를 일기로 옥중 순국하였다.
[함양의 의병장들]
문태서의 중군장이었던 전성범(全聖範) 장군은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출생으로, 1906년 5월 최익현이 태인에서 의병의 기치(旗幟)를 들고 일어설 때 면암 의진에서 활약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최익현의 의진(義陣)이 와해된 뒤 독자활동을 고수하다가 문태서 의진의 중군장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공적을 쌓았다. 1911년 1월 왜군에 체포되어 대구에서 옥사하였다.
지리산 인근에서 활약한 석상룡(石祥龍)은 함양군의 칠선계곡 출신이다. 1907년 함양군 지리산 일대에서 5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진을 구성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당시 인근 지역에서 활약하고 있던 양한규, 고제량, 문태수 의병장 등과 제휴하여 함양군, 경상남도 산청군, 전라북도 남원시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비호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석상룡은 대체로 지리산을 본거지로 삼아 왜적 다수를 사상케 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11년에 체포되어 5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1916년에 석방되었다.
[의의와 평가]
함양 지역의 항일 의병 전쟁은 초기에는 주로 유생들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으나 점차 민중들의 지지와 참여가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의병 활동의 역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