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353 |
---|---|
한자 | 日帝强占期 |
영어공식명칭 | The Colonial Period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역사.
[개설]
1910년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국권 피탈 이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35년 동안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도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의 정신과 문화가 빠르게 말살되었다. 하지만 경상남도 함양 지역민들은 일본에 저항하고 각종 조직들을 만들어 조선의 정신과 함양을 지켜나갔다.
[행정구역]
1914년 3월 1일부터 안의군에 포함되었던 12개 면 중에 현내, 황곡, 초점, 대대, 지대, 서하, 서상 7개 면이 함양군으로 편입되면서 함양군은 함양, 석복, 마천, 휴천, 유림, 수동, 지곡, 안의, 대지, 서상, 서하, 백전, 병곡의 13개 면이 되었다. 1933년에 안의면이 대지면을 병합하여 13개에서 12개 면이 되었다.
[교육]
일본제국주의 학교인 보통학교가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 들어오기 전 지역 유지들에 의해 지역 아동들의 근대 교육을 위한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1902년 함양의 함명학교, 1906년 지곡의 함덕학교, 1908년 백전의 열신학교, 1910년 안의의 의명의숙과 수동의 동명의숙 등이 있다. 당시 경상남도 함양에 세워진 사립학교에서는 함양 지역의 아동들이 우리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전통 한문교육과 신교육을 함께 실시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역 유지들이 세운 학교들은 일제에 의해 세워진 보통학교에 흡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통치 아래에서도 함양 지역아동들에게 자체적으로 교육을 진행하였다는 점과 이를 통해 이후 다양한 민족운동과 항일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함양 지역을 이끌어 가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점은 평가받을 만하다.
1911년 조선교육령이 공포되면서 함양 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보통학교가 경상남도 함양면과 안의면에 설립되었다. 1911년 함양공립보통학교, 1912년 안의공립보통학교, 1920년 수동공립보통학교, 1921년 지곡공립보통학교·백전공립보통학교, 1924년 서상공립보통학교 등이 있다. 함양의 일본인들은 대부분 공무원, 교사, 경찰 등의 관리들과 상업가(商業家)[상업을 전문으로 하는 일본인]들이었다. 함양의 일본인들은 그 수가 많지는 않았고 자녀 수도 적었지만 일본인 자녀를 위한 학교인 함양심상소학교가 설립되어 운영되었는데 함양읍사무소에 있었던 위성초등학교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듯 소수의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던 위성초등학교는 다수의 학생들이 다니는 조선인 학교보다 시설과 환경이 훨씬 좋아 교육에서도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였다.
[문화]
일제강점기는 대한민국 문화의 암흑기였다. 일제의 조선 문화 말살 정책으로 다양한 문화가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경상남도 함양에서는 마천의 목기나 서상의 유기그릇이 생활용품으로 생산되어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 외에 토기 그릇이 몇몇 군데에서만 생산되고 있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경상남도 함양의 지역 특색에 맞는 문화예술 등의 다양한 발굴과 전승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다양한 자연환경과 설화·민요 등은 여전히 남아 함양의 풍부한 문화자원이 되고 있다.
[종교]
함양군의 사근교회(지금의 수동교회)는 1907년 함양과 거창 등지에 교회가 설립될 시기에 선교사 심익순(W.E.SMITH)과 전도사 김주관에 의해 설립되었다. 김주관 전도사는 심익순 선교사를 보조하며 함양 지역에 여러 교회를 설립하였다. 사근교회 외에도 1907년 봉산(鳳山)교회, 1908년 함양(咸陽)교회 등을 세웠다.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선교사의 순회전도에서 한국인의 조사제도를 두고 조사가 선교사를 대신해서 몇 개 교회를 다니며 전도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황보기(皇甫琪)와 오형선(吳亨善) 등이 있었다. 개평교회, 운곡교회, 칠형정교회, 대남교회, 상남교회 등이 개척교회에 해당되며, 교회에서는 문맹을 퇴치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와 사상을 전파하였다.
[함양인들의 저항]
일제는 조선 전체에 착취와 수탈을 자행하였으며, 함양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함양 지역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운동이 3·1운동 이전부터 노응규 장군, 방한상 의사 등의 활동으로 활발히 일어났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3·1운동은 함양읍과 안의면에서 장날 진행되어 많은 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많은 함양인들이 경찰로 연행되기도 하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각 지역의 청년들과 지역 유지들은 청년회 및 신간회 등을 조직해 3·1독립운동 정신을 이어갔다. 이 외에 백초월, 김응수 등 다수의 함양 출신 인물들이 타 도시 또는 외국에서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을 계속해서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