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795
한자 姜大珣
영어공식명칭 Gang Daesu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혜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2년 1월 16일연표보기 - 강대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강대순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19일 - 강대순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형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44년 8월 23일연표보기 - 강대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3년 - 강대순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강대순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강대순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강대순(姜大珣)[1892~1944]은 아들 강기중(姜基中), 딸 강복기(姜福基)가 있다. 손자는 강호영(姜鎬英), 강호태(姜鎬台), 강호준(姜鎬畯)이 있고 3명의 손녀를 두었다. 강대기(姜大璣)가 셋째 아우이며, 독립운동가 강대한(姜大漢)과 강대익(姜大益)이 집안의 형이다.

[활동 사항]

강대순은 1892년 1월 16일 함안군 함안면 봉성리에서 태어났다. 1913년 비밀 결사 단체인 독립 의군부(獨立義軍部)에 가담하였으나 조선 총독부의 탄압으로 1915년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셋째 아우인 강대기를 만나 한인 무장 독립단을 조직하여 3년간 일본군과 싸웠다. 러시아 혁명으로 공산군에 의해 무장 독립단이 강제 무장 해제되자 1918년 귀국하였다.

강대순은 고종 장례식과 독립 선언식에 참여하였다가 귀향한 후 함안읍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함안읍 만세 운동은 고종의 장례에 참석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이 주도하였다. 실질적 지도자는 이희석(李喜錫)으로 안지호(安知鎬)와 함께 의거 준비를 지휘하였다. 3월 15일 동지들이 협의한 후 조병흠·한관렬 등이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고 한종순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박노일(朴魯一)·김상집(金祥集)·조병대·백낙삼(白樂三)·안갑중 등은 군중을 동원하였다.

함안 장날인 1919년 3월 19일 오후 1시경 비봉산에서 고천제를 올리는 것으로 함안읍 만세 운동은 시작되었다. 오후 2시경 이희석의 독립 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3,000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시위 군중은 함안 경찰 주재소, 우체국, 함안 심상 소학교, 함안 공립 보통 소학교, 함안 공립 보통학교, 등기소 등을 공격하였다. 또한 마산 경찰 서장 기타무라[北村]와 함안 경찰서 순사 부장 오하야시[大林] 등을 잡아서 독립 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함안읍 만세 운동은 단일 시위 운동으로는 다른 의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마산 지방 법원 원심에 회부된 사람만 63명이나 되었다. 강대순함안읍 만세 운동 당시에 체포되어 5월 19일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 받고 마산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진주로 이사하여 강대창(姜大昌)·장두권(張斗權)·황한철(黃漢喆) 지사 등과 함께 항일 고려 구국회(抗日高麗救國會)라는 비밀 결사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추모비를 세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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