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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써 온 김영찬 씨의 영농 일기에 살아 숨 쉬는 청도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018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여수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9년
김영찬 거주지 - 청도군 화양읍 유등 2리지도보기

[개설]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에 거주하는 김영찬이 50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기록한 영농 일지와 일기이다. 영농 일지와 일기는 김영찬이 경작하는 땅의 영농 방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969년부터 2012년 현재까지도 기록 중인 이 영농 일지를 통하여 김영찬은 체계적 영농 방법을 통한 수확량 증대를 위해 노력 중이며, 더불어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농사법의 변화 및 작황에 따른 청도군의 경작물 변화 추이를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영농 일지에서 시작된 영농 일기]

김영찬의 집 작은방 책장에는 검은색의 노트가 가득 차 있다. 35권이 넘는 검은색 노트와 함께 중간 중간 손때가 묻어 표지에서 세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공책들도 눈에 띤다. 총 40여 권의 이 노트들은 김영찬이 50여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써 내려간 영농 일기이다. 김영찬은 “처음에는 영농 일기를 쓸 생각은 아니었다. 농사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농사 일지를 쓰던 것이 이제는 일기가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김영찬은 1969년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2,500여 평[약 8,265㎡]의 농토를 경작하며 영농 일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이 어려워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만, 무엇보다도 정직하면서도 체계적으로 농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7,000여 평[약 2만 3141㎡]으로 늘어난 농토와 함께 영농 일지도 늘어났다. 그리고 농사에 관련된 내용만을 담던 영농 일지는 어느새 일기가 되어 버렸다. 재산이 불어난 만큼 노트도 불어난 것이다.

1969년 영농 일지가 비료와 논갈이 및 심는 과실수의 종류 등에 대한 농사 관련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면, 2012년 현재 영농 일기에는 김영찬의 개인적 이야기들도 엿볼 수 있다.

〈1981년〉

1.18. 송아지 낳음

2.26. 석유 1드럼 49,000, 휘발유 1말 15,800

3.9. PVC 1 2,500 (……)

〈2012년 4월 16일 맑음 추워〉

일찍 아침 먹고 있다가 청도 정 서방 집에 가서 산악회 2011년도 결산서 만들고 집사람 제일 병원에 가서 감기 치료 받고 한양 주유소에서 차에 기름 넣고 집에 와서 전정하고 오후에도 4시경에 천홍 완료하고 뒷밭에 몇 나무 하다가 전정한 것 1리어카 싣고 와서 쌓고 저녁 먹었다.

1979년 초기 영농 일지는 일 년 단위로 농사와 관련된 세세한 내용들을 적고 있다. 언제 송아지를 낳고, 석유와 휘발유는 어떤 가격으로 얼마만큼 구입했으며, 비료는 무엇을 구입했는지 상표까지 꼼꼼하게 기입되어 있다. 또한 중간 중간 모종은 언제 했으며, 씨앗은 언제 싹을 틔웠는지, 비닐은 언제 제거를 했는지, 적과는 언제 했는지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2000년을 넘어가면서 일지는 일기의 형식으로 바뀌면서 개인적인 내용들도 조금씩 삽입되었다. 이렇게 영농 일지가 일기의 형식으로 바뀐 것은 나이가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감퇴되는 기억력을 일기를 통해 보존하려는 목적이 컸다.

[부지런함과 꼼꼼함의 결정체]

김영찬의 영농 일지는 특유의 부지런함과 꼼꼼함의 결정체이다. 2012년 현재 74세인 동갑내기 부인이 특별히 가계부를 쓸 필요가 없다고 할 정도로 김영찬은 매사에 부지런함과 꼼꼼함으로 농사를 짓는다. 영농 일지에서 이러한 꼼꼼함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처음 일지를 쓰기 시작하는 1969년 일지 제일 앞쪽에는 김영찬이 소유하고 있는 논과 밭의 모양을 그려 놓았다. 2,500평 가량 되는 논과 밭은 각각 위치에 따라서 중곡, 고래논, 외마지기, 못간, 새 논, 하부곡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각각의 이름들은 논의 위치에 따라서 붙여진 이름이며, 새 논·못간·하부곡과 같이 비교적 큰 논들은 다시 길가와 안논, 상하, 뒤쪽과 앞쪽 등으로 구분하였다. 구분한 논에는 요소 2되, 중과석[인산] 3.5되 등으로 각 논에 얼마만큼의 비료가 들어갔는지 빼곡히 적혀 있다.

김영찬은 1969년에서 1980년 초까지 논농사 중심으로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사과나무를 비롯하여 복숭아, 감 등을 재배하며 밭농사로 전환하였다. 사과 농사를 짓기 시작할 때는 밭에 식재된 나무들의 위치를 표시해 두었다. 부사와 골든, 국광, 홍옥 등 사과 품종들은 어떻게 배열하며 심었는지를 구분하였다.

“같은 나무라고 하여도 품종에 따라 비료를 달리 사용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열매가 많이 맺히지 않아. 품종에 따라서 비료들이 달라야지.”

하루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영농 일지를 적는 건 그가 생각하는 농사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 비료를 어떤 것을 사용하였더니 벼가 얼마만큼 자라고, 땅에 비료를 어떻게 주었더니 벼가 얼마만큼 기울었다는 것을 영농 일지를 통해서 알 수 있지. 그래야 다음에는 그렇게 안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까. 이게 내 지식이야.”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의 영농 일지는 그 자체로 많은 것을 내포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극히 개인이 농사를 지으면서 기록한 사실들이지만 이 기록들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탐을 내게 되는 그런 정보들이다. 10∼20년 영농 일지를 적어 온 많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50년 이상 일관되게 농사에 대한 정보를 담으면서 일지를 적은 사람은 드물다. 그의 일지가 부러운 동시에 50년 이상 써내려갔을 그의 손과 마음이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기록은 과학이 되다]

김영찬의 영농 일지를 보면 농사는 과학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농사는 정답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해 땅 상태와 계절에 따라서 상시적으로 변화한다. 변수가 많은 땅에 대해 사람들은 그저 열심히 지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일관되게 농사를 짓지만, 아마 그것은 답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마다 꼼꼼하게 적은 내용에는 다음해 농사에 대한 김영찬 씨의 계산과 지혜가 들어가 있다. 농약과 비료, 그리고 모내기를 언제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 기록한 내용에서는 다음 해 농사에 대한 기대와 함께 자연의 변수에 대응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엿보인다.

〈1979년 비료관리〉

2월 22일 감나무 21-17-17 3포, 사과나무 21-17-17 4포

2월 26일 맥추 비료 시비 요소 6.8포

3월 6일 복숭아 거름과 비료 21-17-17 1.2포

3월 15일 마늘밭 소독 마이야 지논 임제

3월 20일 보리 2차 비료 하부곡 밑 약간

3월 29일 마늘밭 소독 다이야 지논 입제

4월 3일 밀양 23호 3되 찰벼 2되

4월 9일 모판 만듦 복합 6되

4월 12일 찰벼 비닐 씌움 23호 2말 침종

4월 14일 송아지 낳음

4월 18일 찰벼 비닐 씌움

4월 23일 일반 벼 15호 침종

4월 24일 일반 벼 모판 만듦

4월 25일 일반 벼 모판 닥크 수화제 소독

4월 27일 오후 일반 벼 씨앗 부름.

(……)

하루도 쉬지 않고 써 내려간 영농 일지 덕은 톡톡히 보았다고 김영찬은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농사만큼 노력의 결과를 정확하게 보여 주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농사만큼 과학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사실도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농사를 지으며 농약과 비료의 시비량, 농사 방법을 정확하게 기록해 두면 다음해 농사에 큰 도움이 된다. 또 영농에도 도움이 되지만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떨어져 낭패를 보는 일이 허다하지만 그럴 때마다 영농일지를 들여다보면서 다시 되 내이기도 하다.”

이렇게 꼼꼼하게 기록한 사실들은 이제 귀농하는 사람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그의 지식에 대해서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귀농하는 이들은 농사를 지음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들을 그의 노트와 지식을 통해서 배우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주요한 일들 또는 이전 자연 재해로 일어났던 사실들은 그의 영농 일지를 통해서 지식을 얻기도 한다. 50년간 축적된 그의 기술은 변화하는 젊은 층의 기술적 영농 방법에 뒤지지 않고 질 좋은 농산품을 생산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젊은 농업인들의 기술과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영농 방법에 밀려 이전 세대들의 두루뭉술한 영농 방법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지만, 김영찬에게는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 김영찬은 부지런함과 꼼꼼한 기록을 통해서 영농의 과학화를 꾀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관심과 부지런함이 농사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귀농하는 젊은 영농인들에게 보여 주는 것 같다.

[가보가 된 영농 일지]

농촌 지도자로서 마을의 굳은 일과 앞장서야 할 일들을 도맡아서 했던 김영찬은 지금도 마을 일에는 앞장서서 행한다. 지역 사회에서도 여러 방면에서 봉사하며 폭넓은 사회 활동을 하고 있어서 화양읍에서는 참신한 지역 유지로 대우받고 있는 중이다. 김영찬은 아직도 잠들기 전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면서 일기를 쓰고 영농 일지를 적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김영찬의 머리맡에는 혹시나 기억을 놓칠세라 늘 검은 노트 두 권이 놓여 있다. 하루를 마무리함에 있어서 일기와 영농 일지를 거르지 않는 특별한 이유를 이렇게 전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적다 보니 이제는 적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계속 적어 나가고 있어요. 지금도 그 약속을 한 번도 어기는 적 없이 적어 나가다 보니 내 나이 70이 넘어도 치매에 걸리지 않고 이렇게 건강이 유지되는 것 같아.”

김영찬의 영농 일지가 혹시나 사장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 이후에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물었다.

“아무리 바빠도 영농 일지는 빠뜨리지 않는다. 잠자기 전에 쓰는 버릇은 내 인생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어서 죽는 날까지 계속 써 자녀들에게 가보로 물려줄 생각이다.”

2남 2녀를 두고 있는 김영찬은 현재 둘째 아들이 그의 일기를 물려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조사자 개인적으로 욕심을 낸다면 이 영농 일지가 개인의 재산으로 보관되고 소장될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가 되던 가공되어서 농사를 짓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로서 거듭나기를 바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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