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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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宗鎬 |
영어공식명칭 | An Jongho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강명리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장혜금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안종호(安宗鎬)[1886~1961]는 1886년 4월 24일 함안군 함안면 강명리에서 태어났다. 손자 안강영(安康榮)이 있다. 함안읍 만세 운동은 고종의 장례식과 독립 선언식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이 계획하였다. 함안읍 만세 운동의 실질적 지도자는 이희석(李喜錫)으로, 안지호(安知鎬)와 의거를 준비하였다. 3월 15일 동지들이 협의한 후, 조병흠·한관렬 등이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고 한종순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박노일(朴魯一)·김상집(金祥集)·조병대·백낙삼(白樂三)·안갑중 등은 인근의 군중을 동원하였다.
함안 장날인 1919년 3월 19일 오후 1시경 비봉산에서 고천제를 올리는 것으로 시위는 시작되었다. 오후 2시경 이희석이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3,000여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할 때 안종호는 선두에 있었다. 군중은 함안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고, 우체국·함안 심상 소학교·함안 공립 보통 소학교·함안 공립 보통학교·등기소 등도 공격하였는데 안종호도 적극 가담하였다. 군중이 마산 경찰 서장 기타무라[北村]와 함안 경찰서 순사 부장 오하야시[大林]에게 독립 운동 사실 증명서를 강요할 때 안종호도 동참하였다.
함안읍 만세 운동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된 대규모 의거이었다. 이 일로 마산 지방 법원 원심에 회부된 사람만 63명이었다. 이 수치는 단일 시위 운동으로는 다른 의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안종호는 함안 만세 운동으로 체포되어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가네모리[金森] 함안 등기 소장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의 시위 참여를 증언함으로써 1년 형을 선고 받았다. 대구 복심 법원에 항소하였지만 기각되어 1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61년 6월 1일 향년 76세로 서거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