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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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敬用 |
영어공식명칭 | Bak Gyeongyong |
이칭/별칭 | 영순,박경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주용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경용(朴敬用)[1892~1961]은 1892년 10월 26일 함안군 함안면 북촌동에서 태어났다. 족보에 자는 영순, 박경현으로 올라 있다. 아들은 박상태(朴相兌)·박태봉(朴泰鳳)·박삼용(朴三用), 손자는 박대근(朴大根)·박현근(朴賢根)·박자근(朴自根)·박순근(朴諄根)·박은래(朴恩來)·박용호(朴容護)이다.
박경용은 1910년 나라를 잃고 우울한 세월을 보내다가, 1919년 3월 서울 독립 만세 운동과 함안읍에서도 의거가 일어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함안읍 만세 운동 준비 과정에서 군중 동원의 책임을 맡았으며 시위 때에는 기물을 파괴하는 등 적극적인 투쟁을 벌였다. 그의 활동은 공판 과정에 잘 나타나 있다.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재판장은 "피고 박경용은 함안 경찰관 주재소에 돌을 던져 기물을 파괴하였다"라고 판시하였다. 순사 부장인 오하야시는 "함안 공립 보통학교 안에서 돌을 던지고 폭행을 하였다"라고 증언하였고, 함안 군수 민인호는 "군중이 흥분하므로 오하야시 순사 부장 집에 몸을 피하였으나 나를 끌어내어 발길질하고 손으로 때리고 귀를 잡아 당기면서 주재소 앞에까지 왔다. 이때 모자와 칼을 빼앗고 제복을 사정없이 찢고는 만세를 부르도록 협박할 때 박경용은 주재소 안에서 다른 폭행자와 함께 폭행을 하였다"라고 하였다. 박경용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형을 선고 받았다. 이때 고문으로 다리가 부스러져 장애의 몸이 되었다.
[묘소]
묘소는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넙드등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6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