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7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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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亨道 |
영어공식명칭 | Jo Hyeongdo |
이칭/별칭 | 대이(大而),경달(景達),동계(東溪),청계 도사(淸溪道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은제 |
[정의]
조선 후기 함안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개설]
함안 조씨(咸安趙氏)는 함안을 본관으로 하여 함안에 세거하며 오랫동안 함안을 대표하는 제일의 성족이 되어 왔다. 조선 전기에 이르러 어계(漁溪)조려(趙旅)의 손자 내헌(耐軒)조연(趙淵)이 청송으로 장가를 들어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청송에도 함안 조씨 일파가 세거하게 되었다. 조연은 1562년(명종 17) 함안으로 돌아왔지만, 둘째 아들 망운정(望雲亭)조지(趙址)가 청송 안덕리로 가서 살았으므로 그 후 청송에서 일문을 이루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조지의 아들인 동계(東溪)조형도(趙亨道)는 청송에서 태어나 청송에서 생애를 마쳐 청송을 대표하는 문무를 겸전한 조선 후기의 인물이다. 함안에 거주하는 백부 검암(劒巖)조우(趙堣)에게 입계하였으므로 일생 동안 함안을 왕래하며 살았다.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생육신 조려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조지였으나 큰아버지 조우에게 입양되었다.
[활동 사항]
조형도(趙亨道)[1567~1637]는 한강(寒岡)정구(鄭逑)와 죽유(竹牖)오운(吳澐) 등 퇴계(退溪)이황(李滉)과 남명(南冥)조식(曺植)의 양문을 출입한 학자들을 스승으로 삼아 퇴계 학파와 남명 학파를 아울러 배웠다. 또 생가 청송과 양가 함안을 오가며 경상 좌도와 경상 우도의 인물들과 동시에 교류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화왕 산성에서 의병 활동을 하여 훈련원 주부로 임명되었다. 1594년(선조 27)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 겸 비국랑(宣傳官兼備局郞)에 임명되었다. 1606년(선조 39) 고성 현령에 임명되었고, 1609년(광해군 1) 본영 중군 김명윤(金明胤)의 참소로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첨지중추부사 정광적(鄭光績) 등의 변호로 풀려났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한 뒤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다시 관직에 나가 토포사로 영천 감옥에서 탈옥한 이경기(李景祺) 일당을 붙잡는 데 공을 세웠다. 1622년(광해군 14) 순변사 유비(柳斐)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곧 경덕궁의 호위장이 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군사를 모아 궐문을 지켰고, 이 공으로 보성 군수에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예병을 모아 왕의 수레를 호위하였다. 이후 괴산 군수에 임명되었으며, 1629년(인조 7) 경주 영장이 되었다.
[학문과 저술]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간송(澗松)조임도(趙任道) 등과 더불어 퇴계 학파와 남명 학파를 융합하고 문무를 겸전한 것이 이 가문 인물들의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저서로 3권의 『동계집(東溪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충렬록(忠烈錄)』과 『존주록(尊周錄)』에 조형도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