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6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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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豪族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광철 |
[정의]
통일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 경상남도 함안 지역 사회에 있었던 독립적 지방 세력.
[개설]
호족(豪族)은 신라 하대 이후 진골 귀족이 분열되면서 지방에 성읍(城邑)이라는 독자적 영역을 만들어 주민들을 무장시키고 성주(城主)·장군(將軍)을 칭하면서 지방을 독립적·반독립적으로 다스리던 지방 세력을 말한다. 호족을 출신별로 보면 해상 세력, 촌주(村主) 출신, 지방관 및 낙향 귀족, 군진 세력(軍鎭勢力) 등 계층이 다양하다. 이들은 신라 말 호부층(豪富層)으로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다가 항쟁 세력을 끌어들여 군사적 기반을 갖추고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이들 호족은 성주, 장군, 지주제군사(知州諸軍事) 등으로 자리하면서 당대등(堂大等)·대등(大等) 관할 하에 호부(戶部)·창부(倉部)·병부(兵部)로 구성된 독자적 행정 조직인 관반 체제(官班體制)를 갖추고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함안의 호족]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함안군과 칠원현의 성씨(姓氏) 조에는 이 지역 토성(土姓)으로 함안은 이(李)·조(趙)·채(蔡)·윤(尹)·유(劉)·정(鄭) 등 6개 성씨, 칠원은 김(金)·윤(尹)·정(丁) 등 3개 성씨를 소개하고 있다. 토성은 지역의 토착 세력으로서, 고려 건국 후 지방 통제가 강화되면서 이들은 군현의 ‘향리(鄕吏)’, ‘이족(吏族)’으로 자리했다. 향리는 장리(長吏), 외리(外吏)라고도 부르고, 군현의 읍격에 따라 주리(州吏)·부리(府吏)·군리(郡吏)·현리(縣吏)·역리(驛吏)·부곡리(部曲吏) 등으로 호칭되었다.
토성은 나말여초 지방 세력인 호족의 후예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 함안 지역 사회의 9개 토성은 모두 나말여초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이들 토성 가운데 호족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성씨로는 함안 조씨와 칠원 윤씨를 들 수 있다. 함안 조씨 시조(始祖)는 고려 초 대장군을 지낸 조정(趙鼎)이다. 조정은 당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하였으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으로 대장군에 올랐다고 한다. 조정의 직함으로 ‘대장군’, ‘원윤(元尹)’을 칭하고 있는 점도 호족이었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칠원 윤씨는 신라무열왕 때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낸 윤시영(尹始榮)을 시조로 한다. 칠원 윤씨 족보 『경신보(庚申譜)』의 세록편(世錄遍)에서는 윤시영이 칠원백(漆原伯) 혹은 호장랑(戶長郞)을 지냈다고 서술하고 있어 나말여초 칠원 지역의 호족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호족의 동향]
함안 지역 사회의 인근 지역인 진주와 의령 지방에는 유력한 호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진주 지역의 강주 장군(康州將軍) 윤웅(閏雄)과 유문(有文), 의령 지역의 천주 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가 이들이다. 왕봉규는 해상 무역을 통해 중국의 후당(後唐)과 교류하는 등 그 세력이 강성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왕봉규는 처음 의령 지방을 근거지로 삼았으나 뒤에 진주 지방까지 장악하였다. 독자적으로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으며, 927년(태조 10)에 후당의 명종(明宗)으로부터 회화 대장군(懷化大將軍)의 관작을 받았다.
함안과 진주 지역에 형성된 호족은 후삼국이 성립되는 시기에 처음에는 고려에 귀순하는 형식을 취했다. 강주 장군 윤웅이 920년(태조 3)에 자기 아들 일강(一康)을 고려에 인질로 보내고, 고려에서는 일강에게 아찬 벼슬을 주는 한편, 행훈(行訓)의 누이동생으로 그의 처를 삼게 한 것이 그것이다. 927년에는 돌산향(突山鄕) 등 강주 관할 4개의 향이 고려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유문은 928년(태조 11) 후백제견훤에게 항복하고 있다. 이제까지 고려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던 진주 일대 호족은 견훤의 공략에 따라 후백제 권역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는 진주 지역뿐 아니라 경상남도 연안 일대가 후백제 쪽으로 기울어지는 일반적 추세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함안 지역의 호족도 이후 후백제 영향권에 놓였을 것이다. 후삼국 말 이같이 함안을 비롯한 경상남도 연해 지역이 후백제 권역으로 편입되었던 경험은 고려가 후삼국 통합에 성공한 이후 지방을 편제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치적 고려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