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6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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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心齋集 |
영어공식명칭 | Simjaejip |
이칭/별칭 | 『심재 선생 문집(心齋先生文集)』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동욱 |
[정의]
1971년에 간행된 함안 출신의 유학자 조성렴의 시문집.
[저자]
조성렴(趙性濂)[1836~1886]은 12~13세에 본격적으로 공부에 몰두해 경서의 뜻을 이해했으며, 글을 지으면 보는 사람이 놀랄 정도였다. 1864년 성재(性齋)허전(許傳)이 김해 부사로 내려오자 찾아가 스승으로 섬기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때 의심나는 것을 물어보자 허전이 그의 학문에 탄복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조성렴은 허전이 김해를 떠난 후에도 스승이 내린 ‘心’ 자를 항상 가슴에 새기며 생활하였다. 1866년 5월에 스승 허전이 70여 명의 문도들과 함께 함안의 합강정(合江亭)에 모여 낙동강을 유람했는데, 동행하면서 학문을 토론하였다. 1868년 모친이 병이 나자 단지(斷指)를 했으며, 상을 당해서는 3년 여막을 지켰다. 1876년[병자년]에 흉년이 들자 조성렴은 논밭을 팔아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였다. 조성렴의 덕망과 선행이 널리 알려져 조정에서는 통덕랑(通德郞)의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편찬/간행 경위]
『심재집(心齋集)』은 조성렴이 세상을 떠난 80여 년이 지난 1971년에 간행되었다. 서문(序文)은 면우(俛宇)곽종석(郭鍾錫)이 짓고 발문(跋文)은 손자 조용구(趙鏞玖)가 지었다. 곽종석이 지은 서문에 의하면 아들 조병규(趙炳奎)와 조경규(趙慶奎)가 글을 부탁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문집 간행 계획은 1919년 이전에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문을 받을 당시 발간하지 못하고 있다가, 회서(晦西)조용뢰(趙鏞雷)가 다시 원고를 수집하여 발간하려다 병자호란 등 여러 변고로 발간하지 못하였다. 손자 조용구의 주도로 1971년에 발간되었다. 『심재 선생 문집(心齋先生文集)』이라고도 불린다.
[형태/서지]
4권 2책의 신연활자본(新鉛活字本)이다. 판식은 사주 쌍변(四周雙邊)이며, 1면 12행에 1행의 자수는 28자이다. 권수제와 판심제는 '심재 선생 문집(心齋先生文集)'으로 되어 있다. 경상 대학교 문천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권1에는 한천재 등지에서 벗들과 공부하면서 지은 시 등 87제(題) 107수(首)를 비롯한 계당유주목의 만사(挽詞) 등 7수, 스승인 성재허전에게 보내는 편지글 등 37편이 실려 있다. 권2에는 관찰사 박제동(朴齊寅)에게 보내는 편지글 등 73편이 실려 있다. 권3에는 「취정록(就正錄)」 등 잡저(雜著) 11편과 「함주 삼강록서(咸州三綱錄序)」 등 서문 9편이 실려 있다. 권4에는 「두류록기(頭流遊記)」 등 기(記) 9편, 「사의절요발(士儀節要跋)」 등 발(跋) 7편, 상량문(上樑文) 1편, 축문(祝文) 1편, 제문(祭文) 13편, 구묘문(丘墓文) 1편, 행장(行狀) 7편과 부록으로 「부지암기(不至庵記)」와 「심재기(心齋記)」가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성렴은 함안에서 성재허전의 학문을 진작시킨 핵심 인물이다. 무엇보다 사대부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과 자의식(自意識)을 견지하고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허전과 낙파(洛坡)유후조(柳厚祚) 등 당대 명유들과 교유하면서 남긴 편지글 속에는 양심 공부(養心工夫)를 통해 선비로서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교육 활동을 통해 마을의 학풍 진작에 힘쓴 흔적들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