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기 민간인 오폭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357
한자 6·25 戰爭期 民間人 誤爆 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8월 2일연표보기 - 군북면 원북리 주민들이 북한군과 유엔군의 교전 과정에서 박격포 등 포격으로 희생
종결 시기/일시 1950년 8월 18일연표보기 - 미군 전투기들이 민간인이 피난해 있는 터널 안으로 로켓과 기관총 공격을 퍼부음
성격 사건

[정의]

1950년 6·25 전쟁 기간 함안 지역에서 미 공군의 폭격에 의해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

[개설]

6·25 전쟁 동안 미 공군의 폭격 과정에서 수많은 민가들과 시설들이 파괴당하였고,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6·25 전쟁에 뛰어든 미군 병사들은 북한의 정규군과 게릴라 부대, 또 피난민의 행렬을 구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작전에 방해가 되거나 적으로 인식되면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 희생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전면적으로 남침을 개시하자 미국은 국제 연합의 승인을 얻어 유엔군을 구성하여 반격을 시작하였다. 미국은 본토에서 지상군이 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에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주일 미군의 지상군 병력을 보내어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필리핀과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공군의 비행기들을 동원하여 막대한 폭탄을 퍼부었다.

[경과]

함안에서는 1950년 8월 2일에 군북면 원북리 주민들이 북한군과 유엔군의 교전 과정에서 박격포 등 포격으로 희생되었다. 놀라고 당황한 마을 주민들은 전쟁의 참화를 피해서 대부분 마을을 떠났다. 그러나 주변 어디서든 폭격 피해를 당할 위험은 여전하였기에 주민들은 다시 마을로 돌아와 근처에 있던 기차 터널인 어시굴로 피신하였다. 길이 약 300m의 어시굴에는 수백 명의 마을 주민들이 피신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3일에 세 명의 주민이 터널 밖으로 나갔다가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일을 겪은 후라 터널 밖보다 터널 안이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였다. 그러나 1950년 8월 18일에 미군 전투기들이 터널 안으로 로켓과 기관총 공격을 퍼부었다. 폭격은 한 시간 정도 계속되었고 그 공격으로 인해 희생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

[결과]

전쟁의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에 대해 정부 당국과 미군은 쉬쉬하였다. 그러다 1990년대가 지나 언론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의의와 평가]

민간인 희생에 대한 미국과 한국의 사과를 요구하였으며, 반미 정서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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