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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1228
한자 蠶業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용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의 산업 중 누에를 사육하여 고치를 생산하는 업종.

[개설]

우리나라 잠업의 역사는 삼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미 이때부터 양잠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농업과 제조업의 한축을 담당했던 잠사 산업이 산업의 구조 조정을 겪으면서 사양화되었다. 청도군 또한 1960년대까지 잠업이 성행하였지만 1970년대 이후 과수 재배 증가와 뽕나무밭에 대한 농약 과다 사용 등으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변천]

일제 강점기 청도읍 고수리와 화양읍 상평리에는 잠업을 통해 견사를 생산하는 기업체가 수십 곳이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위치로 옮기기 전 청도읍성 부근 군청 동편에는 잠견 공매장 건물이 있었고, 그 옆에 잠령 석탑(蠶靈石塔)이 세워져 있었다. 청도군 내에는 잠업 기숙관으로 일본인 목곡(木谷)이라는 자가 청도군에 잡업 순회 지도자들을 순방했을 정도로 성행하였다. 1930년 청도군내 견 생산량은 1,835.5석(石)이었으며, 공매량은 1,835.9석이었다. 세계적으로 생사(生絲) 수요가 급증하면서 해방 후 잠업은 더욱 더 성행하게 된다.

외화 획득에 주요 공신이 되면서 많은 마을에서 잠업을 위한 뽕나무밭을 조성하면서 양잠 농가는 증가하였다. 1957년에는 뽕나무 밭의 면적이 4.02㎢[405.6정]에 양잠 농가의 수는 6,759가구에 달하였다. 이때 생산량은 2,832㎏으로 모두 공매되었다. 그러나 1964년에는 뽕나무 밭의 면적이 늘어나 6.41㎢[646.9정]에 달했으며 양잠 농가는 1만 3904가구에 달하였다. 이때 생산량은 5만 8268㎏에 달했지만 공매량은 절반인 2만 6901㎏만 공매되었다. 이는 1950년대 이후 급격한 수요 급증으로 인하여 양잠 농가가 증가하였고, 이후 다시 양잠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는데 생산량은 그대로 유지되어 실질적으로 생산량만큼 공매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뜻한다. 1970년 이후 청도군 내 제사 공장이 설립되고 가동을 하였지만, 이미 많은 농가가 하향 곡선을 그리는 양잠 대신 과실 농사로 바뀌었다.

[현황]

청도군의 경우 잠업이 상당히 쇠퇴하였다. 2011년 기준으로 청도군 고수리매전면 온막리에 각 1개의 잠업 시설이 있었다. 2012년 현재 그나마 남아 있던 잠업 시설은 매전면 온막리의 1개로 줄어들었다.

[의의와 평가]

청도군에서는 잠업 전업 농가가 거의 사라지고 있다. 매년 국가 보조금을 통하여 지원하고 있으나, 전국의 다른 지역들에서 잠업이 쇠퇴하듯이, 청도 또한 잠업이 다시금 활성화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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