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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729
한자 西上里碑石群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도주관로 146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채광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37년연표보기 - 서상리 비석 떼 정흠선 선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54년연표보기 - 서상리 비석 떼 조석우 불망비 견립
건립 시기/일시 1879년연표보기 - 서상리 비석 떼 김석근 원류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71년연표보기 - 서상리 비석 떼 척화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85년 8월 5일 - 청도 척화비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09호에 지정
현 소재지 서상리 비석 떼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15-10지도보기
원소재지 서상리 비석 떼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15-10
성격 선정비|척화비
양식 비좌하엽[정흠선 선정비]|규수[조석우 불망비·김석근 원류비·척화비]
관련 인물 정흠선|조석우|김석근|흥선 대원군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너비,두께) 정흠선 선정비 : 215㎝[높이]|63㎝[너비]|조석우 불망비 : 146㎝[높이]|40㎝[너비]|김석근 원류비 : 135㎝[높이]|40㎝[너비]|척화비 : 120㎝[높이]|44㎝[너비]
소유자 청도군청
관리자 청도군청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도주관에 있는 조선 시대 비석 떼.

[개설]

정흠선(鄭欽先)은 본관은 동래, 자는 지숙이다. 문과 급제 후 판관(判官), 청도 군수,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부호군(副護軍) 등을 역임했다. 청도 군수에는 1730년(영조 6) 12월에 도임하여 1735년(영조 11) 10월에 임기 만료되었다.

조석우(曺錫雨)는 1810년(순조 10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창녕, 자 치용(稚用), 호 연암(烟巖), 시호 문정(文靖)으로 조선 후기 문신이다. 1835년(현종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양주 목사, 이조·공조 참판, 경기도·함경도 관찰사를 역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재직 중 고조부 조하망(曺夏望)의 문집인 『서주집(西州集)』 간행 시 윤증(尹拯)에 대한 제문 속에서 송시열을 비난한 글을 삭제한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당하여 중화에 유배되었다. 1857년(철종 5) 석방되어 공조 참판과 이조 판서를 지냈다.

김석근(金奭根)은 1820년(순조 20)에 출생하였고 본관은 안동, 자는 보여(保汝)이다. 1844년(헌종 10) 갑진(甲辰)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하였다. 음직으로 함양 군수, 임실 현감, 청도 군수, 무주 부사, 상주 목사 등 주로 외직에서 근무하였다. 청도 군수는 1864년(고종 1) 6월 20일에 부임하여 1867년 6월에 무주 부사로 이배했다.

[건립 경위]

정흠선 선정비는 정흠선이 청도 군수로 재임하던 1734(영조 10)년에 청도 향교화양읍 합천리에서 지금의 교촌리로 이건한 공로를 기념하기 1737년(영조 37) 10월에 세웠다.

조석우 불방비는 비문에 의하면 구휼 공덕을 칭송하기 위하여 1854년(철종 5)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1864년(고종 1) 청도 군수 김석근이 청렴하고 명철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이배할 당시 모든 백성들이 길을 막고 유임시켜 주기를 원해 경상도 관찰사 서헌순(徐憲淳)이 그대로 본직에 유임시켜 달라는 장계를 올려, 전교에 의해 다시 청도 군수에 제수하였다. 그래서 김석근의 비석은 일반 선정비와는 다르게 그 명칭을 원류비(願留碑)로 새겨 1879년(고종 16)에 세워졌다.

척화비(斥和碑)는 흥선 대원군이 외세 침략에 대해 거부하는 의지를 새긴 것으로 1871년(고종 8)에 건립한 것이다.

[위치]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도주관(道州館) 내에 선정비 3기가 있고, 척화비는 도주관 입구에 있다. 원래 척화비는 도로변에 있던 것을 현재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형태]

군수 정흠선 선정비는 비신 이하는 절단되어 있고 비신과 비갓이 한 몸으로 제작되어 있다. 비갓은 6엽의 연꽃 모양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여, 그 위에 보주(寶朱)로 장식한 비좌하엽(碑座荷葉) 양식이다. 전면에는 비명(碑銘)을, 후면에는 간지(干支)와 건립 관련자 이름을 각석해 두었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높이 215㎝, 너비 63㎝로 규모가 큰 축에 속한다.

순찰사 조석우 불망비는 비신 이하는 절단되어 있고 규수(奎首) 양식이다. 전면에는 비명과 찬시(讚詩)를, 후면에는 간지와 건립 관련자 명단을 각석해 놓았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높이 146㎝, 너비 40㎝이다.

군수 김석근 원류비는 비신 이하는 절단되어 있고 규수(奎首) 양식이다. 전면에는 비명과 찬시를 후면에는, 간지를 각석해 놓았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높이 135㎝, 너비 40㎝이다.

척화비는 규수 양식이며, 전면에 비명과 간지를 각석해 놓았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높이 120㎝, 너비 44㎝이다.

[금석문]

1. 정흠선 선정비

(전면)

군수 정 공 흠선 휼민 선정비(郡守鄭公欽先恤民善政碑)

(후면)

정사 십월일립(丁巳十月日立)/ 유사 정천복(有司鄭天復)

2. 조석우 불망비

(전면)

순찰사 조 상국 휘 석우 영세불망비(巡察使曺相國諱錫雨永世不忘碑)// 연름제구(捐廩齊救)/ 발창주민(發倉周民)/ 정적사보(停糴斯普)/ 표치역균(俵菑亦均)[곡식을 내어 골고루 구원하고/ 창고를 풀어 두루 주민을 돌보셨네./ 쌀 매입 멈추길 이에 널리 미치었고/ 묵정밭 나누는 것도 고르게 하셨네.]

3. 김석근 원류비

(전면)

군수 김석근 원류비(郡守金侯諱奭根願留碑)// 해의차로(解衣遮路)/ 함복민심(咸服民心)/ 천종민원(天從民願)/ 아후재림(我侯再臨)[옷을 벗고 길에서 대기하니/ 민심이 모두 복종 하였네./ 임금님[하늘]은 백성들의 소원을 따라/ 우리 군수님을 다시 부임케 하소서.]

4. 척화비

(전면)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 계아만년자손(戒我萬年子孫)/ 병인작 신미립(丙寅作 辛未立)[오랑캐가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다./ 화친을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 만년토록 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1866]에 짓고, 신미년[1871]에 세우다.]

[현황]

화양읍 서상리에 있는 조선 시대 객사인 도주관(道州館)에 원래 선정비 외 32기가 세워져 있던 것을 2009년 청도읍성을 복원하면서 이들 4기만 남겨두고 모두 이전하였다. 그 이유는 군수 정흠선 선정비와 순찰사 조석우 불망비가 가운데 절단된 상태로 비석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인 듯하며, 척화비는 원래 위치이기 때문에 굳이 이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석우 선정비는 청도 외에 포항과 영천에 2기가 더 남아 있다. 척화비를 제외하면 비석들의 상태가 양호하지 못하고 별도의 안내판은 없다.

[의의와 평가]

선정비 3기 모두 훼손이 심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이는 비단 청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지역 남아 있는 조선 시대 선정비도 비슷한 형편인 경우가 많다. 이는 선정비에 대한 부정적 관념과 사료로서 가치를 떨어진다는 선입견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김석근 원류비처럼 문헌 사료를 입증하는 역할 및 지방사 사료로서 유용한 선정비도 있음을 알려주는 소중한 선정비로 평가할 수 있다.

1985년 8월 5일에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09호로 지정된 청도 척화비는 비교적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당시 외교 정책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는 유물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12.22 [개설] 수정 <변경 전> 1735년(영조 11) 10월에 파직되었다. <변경 후> 1735년(영조 11) 10월에 임기 만료되었다.
이용자 의견
정원종 [개설] 두째줄 말미에 {파직되었다.}를 인물란 [활동사항]과 같이 [임기가 차서 벼슬을 그만두었다.]로 수정하여 주십시오. 잉임까지 하신분이 파직되시진 않으셔으리라 봅니다.
  • 답변
  • 디지털청도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