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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719
한자 龍岡書院忠烈祠-十四義士廟庭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모산길 45-4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최인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867년연표보기 - 용강서원충열사및14의사묘정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98년 8월 3일연표보기 - 용강서원충열사및14의사묘정비 경상북도 기념물 제129호에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용강서원충열사및14의사묘정비 경상북도 기념물 재지정
현 소재지 용강서원충열사및14의사묘정비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학산리 450지도보기
성격 사당|묘정비
양식 비석
관련 인물 박경신|박경인|박경전|박경윤|박경선|박선
소유자 밀양 박씨 용강 문중
관리자 밀양 박씨 용강 문중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북도 기념물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학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사당과 묘정비.

[개설]

밀양 박씨 박경신 등 부자, 형제, 숙질, 종형제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맞서 싸운 충절을 기리는 사당과 비석으로 이서면 학산리 모산마을 용강 서원 안에 있다. 여기에 언급된 인물은 모두 14명으로 박경신(朴慶新), 박경인(朴慶因), 박경전(朴慶傳), 박경윤(朴慶胤), 박경선(朴慶宣), 박선(朴瑄), 박찬(朴璨), 박지남(朴智男), 박철남(朴哲南), 박린(朴璘), 박우(朴瑀), 박구(朴球), 박숙(朴琡), 박근(朴瑾)이다. 이 중 12명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2·3등에 각각 책봉되었고, 1명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비석은 건립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비각 안에 있으며, 이수·비 몸체·비 받침을 갖추고 있다. 비문은 동몽교관(童蒙敎官) 김시찬(金是瓚)이 짓고, 이가환(李家煥)이 글씨를 썼으며, 1998년 8월 3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14의사 묘정비의 비문은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전액으로 비석의 제목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전서체로 ‘십사의사묘정비명(十四義士廟庭碑銘)’이라 하였다. 두 번째 부분은 서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비문을 서술하게 된 동기이다. 임진왜란 때 해양 고씨 가문의 고경명(高敬命), 고인후(高因厚), 고종후(高從厚)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것이 가문의 큰 영광이 되었다. 그런데 『충효록(忠孝錄)』을 살펴보니 청도의 밀양 박씨 가문 역시 나라가 임진왜란 등 외적의 침입을 받아 위기에 처하였을 때 14명의 의사(義士)가 한 집안에서 나왔음을 말하고 있다.

다음 세 번째 부분은 본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14의사의 이름과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내용, 포상, 이후의 상황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14의사는 사직(司直) 박경신, 그의 아들 급제(及第) 박지남, 둘째 아들 사복(司僕) 박철남, 형의 아들 무사 박찬, 박우, 사인(士人) 박숙, 동생 장사(將仕) 박경인, 박경인의 아들 선행(善行) 박선, 당제(堂弟) 첨사(僉使) 박경전, 무사 박경윤(朴慶胤), 박경윤의 아들 주부(主簿) 박린(朴璘), 서자 부장(部將) 박구(朴球), 막내 동생 만호(萬戶) 박경선, 재종질 진사 박근이다.

박경전, 박경윤, 박경선 3형제와 박경인 이하 동생, 조카들과 함께 글을 써서 의병(義兵)을 일으키기로 맹세하였다. 이에 4월 25일 박경전이 대장군이 되어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고, 당형 박경인, 동생들에게 각기 임무를 맡게 하였다. 그 후 40여 차례나 왜적과 싸워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이들은 의병을 일으킨 지 10여 일간 계속 되는 싸움에서 모두 이김으로써 청도 부근 백성들은 들판에서 안전하게 되었다.

난이 평정되자 공로의 차례를 매겼는데, 박경신은 종훈(從勳) 1등에 서훈(敍勳)되고 나중에 소사마(小司馬)를 증직 받았으며, 아들 박지남은 2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정경의 반열에 올라 나중에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까지 올랐다. 박철남은 2등에 녹훈되고 부장(部將)으로 관직을 마쳤으며, 박찬은 3등에 녹훈되고 첨정(僉正)까지 지냈으며, 품계는 가선(嘉善)이었다. 박우는 진무(振武) 1등에 서훈되고 남포현감(藍浦縣監)이 되었다가, 병자호란 때 쌍령(雙嶺)에서 전사하여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박숙은 가장 나이가 어렸는데 3등에 녹훈되고 봉사(奉事)로 관직을 마쳤다. 박경인은 미처 녹훈이 되지 않았었다가 나중에 시어사(侍御史)에 근증(殣贈)되었다. 박경인의 아들 박선은 전에 효성으로 능관(陵官)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는데, 난리 중에 유명을 받들어 상복을 입은 채 종군해서 공을 세웠으나 역시 또 다른 사람에게 공로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3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우부풍(右扶風)에 이르렀으나 또 관직에 나가지 않았는데, 을묘당(乙卯黨)을 피해서였다.

박경전은 2등에 녹훈되고 나중에 대사마(大司馬)에 증직되었으며, 박경윤은 2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첨정(僉正)이 되었으며 나중에 대사구(大司寇)에 증직되었다. 박경윤의 아들 박린 역시 2등에 녹훈되었는데, 병자호란 때 청도 사람들을 모아 맹세했으나 이윽고 그만두게 되었다. 관직은 첨정까지 지냈고 나중에 나이가 많아 가선(嘉善)으로 품계가 올랐다. 박린의 서제(庶弟) 박구는 3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박경선은 충효로써 나중에 대언(代言)에 증직되었고, 박근은 2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참봉이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다음은 비석을 세우게 된 의의를 나타낸 부분으로 다른 사람들은 도망하기에 바쁜데도 14명이 모두 한 집안에서 나와 외적의 침입을 막았으니 후세 사람들은 예로써 능히 대란을 막을 경우 제사 지내고, 목숨을 바쳐 성실히 일한 경우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당연히 표시하고 드러내야 했다. 그러므로 도신(道臣)으로 있는 사람이 권하여 사당을 세우고 14인을 모두 제사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비를 세워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명문(銘文)을 부탁하니 사양하지 못했다

마지막 네 번째 부분은 앞의 내용을 마무리하는 부분으로 짧은 시이다. 의사가 14명이고, 이중 공을 세운 사람이 10명, 전사한 사람이 2명, 나중에 입근(立殣)한 사람이 1명이고, 두 사람은 질박한 덕을 지녔기 때문에 오래도록 전하는 가르침이 해양 고씨에 버금가는 것이라 하고 있다. 그리고 비문 지은이는 봉조하(奉朝賀) 전(前) 동몽교관(童蒙敎官) 김시찬임을 밝히고 있다.

[건립 경위]

14의사 묘정비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박경신 등 14명의 밀양 박씨 문중 인물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비문은 김시찬이 짓고, 이가환이 글씨를 썼다. 김시찬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자신의 외가인 해양 고씨 문중의 고경명, 고인후, 고종후임진왜란 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함으로써 문중이 크게 빛나고 우러르게 되었는데, 이제 박정병(朴廷柄)을 만나 『충효록(忠孝錄)』을 보니 밀양 박씨 문중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어 비문을 짓는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밀양 박씨 문중에서 선조들의 공훈을 기리고 귀감으로 삼고자 비석의 건립을 결정한 후 비문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면서 『충효록(忠孝錄)』을 제공하였고, 김시찬은 이를 바탕으로 비문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비문을 바탕으로 1876년 비석을 건립하고 비각을 짓게 되었다.

충열사는 14명의 의사를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이들을 제향하는 용강재(龍岡齋)는 1794년(정조 18) 이래 후손들을 위시한 지역 사림들이 사우로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 1816년(순조 16) 충열사(忠烈祠)로 개편되었다. 1868년(고종 5)에 훼철 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인 1913년에 용강 서당(龍岡 書堂)이 건립되었다. 1935년 요사, 관리사, 창고, 14의사를 봉안한 숭의사(崇義祠)가 충열사로 용강 서당이 용강 서원으로 개명되었다. 1960년 강당이 건립되었다.

[위치]

이서면 학산리 모산 마을 서쪽 기슭 용강 서원 내에 있다. 이서면사무소에서 이서로를 따라 팔조령 방면으로 가다 학산 삼거리에서 모산길로 접어들면 용강 서원으로 갈 수 있다.

[형태]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이수·비 몸체·비 받침을 갖추고 있다. 이수는 용무늬를 새겼고, 비 받침은 큰 장식 없이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다듬어 비신을 세웠다. 비신은 앞면 위쪽에 가로로 전자를 새기고, 아래는 세로로 비문을 새겨 넣었다. 충열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이익공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현황]

1876년에 건립된 14의사 묘정비는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비각에 보존되고 있으며, 밀양 박씨 용강 문중에서 관리하여 잘 보존되어 있다. 비문도 빠진 글자 없이 잘 읽을 수 있다. 충열사와 비를 포함하여 용강 서원 전체가 1998년 8월 3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2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소유자인 밀양 박씨 용강 문중이 관리하고 있다. 용강 서원과 비각에는 표지판이 있다.

[의의와 평가]

14의사 묘정비임진왜란밀양 박씨 한 문중에서 14명의 의병장이 나와 위기에 처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운 내용을 전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청도 주변 지역의 전투 상황과 의병의 배치 형태 등이 자세하게 언급되고 있어 의병 연구 자료 중요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김** 비문의 撰하신 분이 개설 5째 줄에 김시진으로 되어 있고, 마지막 줄에는 김시찬으로 되어 있습니다.
십사의사록 인권 113쪽과 김시찬의 일일재집에 의하면 김시찬(金是瓚)으로 앞 부분의 이름이 잘못되었습니다.
  • 답변
  • 디지털청도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기된 이름을 수정하였습니다.
2017.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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