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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14
한자 朝鮮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홍갑

[정의]

1392년부터 1863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된 시기 경상북도 청도 지역의 역사.

[개설]

조선 시대 청도 지역은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호구 수는 640호 6,718인으로, 절반의 토지만 비옥했고, 풍속은 검솔했으며, 양잠에 힘썼다고 한다. 군사 동원 체제인 진관은 대구도(大丘道)에 귀속되어 청도 군수가 경상좌도의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를 겸임하였다.

고려 후기 이래로 대성(大姓)이 많은 지역으로서, 조선 초기 이래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김일손(金馹孫)·김대유(金大有) 등은 사림파로 이름을 크게 떨쳤고, 임진왜란 때에는 이운룡(李雲龍)이 전공을 세웠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대구부에 속하게 되었다. 1896년의 지방 제도 개편으로 13도제에서는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1906년 대구군에서 풍각면·각남면·각북면 지역을 받고, 1912년 밀양군과 지역 조정을 하여 지금의 영역이 고정되었다.

[행정 및 군사]

청도는 군으로서 고려 후기의 읍격(邑格)을 유지한 채 지역적인 큰 변동은 없었다. 종4품의 군수를 파견하여 군의 행정과 군사 업무 일체를 맡겼고, 아울러 향교에 종9품의 훈도를 파견하였으나, 조선 시대 후기에 없어졌다. 청도의 지세는 땅콩을 눕힌 모양의 좌·우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가운데에 곰티재[웅치(熊峙)]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생활권도 곰티재 서쪽을 산내(山內), 동쪽을 산외(山外)로 크게 구분하였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17세기 무렵에는 10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관아 소재지인 상읍내면(上邑內面)[화양읍 일대]을 비롯하여, 동북으로 20리[7.855㎞] 떨어진 차읍내면(次邑內面)[화양읍에서 남성현에 이르는 지역], 서북으로 15리[5.891㎞] 떨어진 상북면(上北面)[이서면 지역], 북으로 20리 떨어진 차북면(次北面)[이서면 지역], 동으로 50리[19.636㎞] 길인 상남면(上南面)[매전면 지역], 남으로 40리[15.709㎞] 길인 하남면(下南面)[청도읍 지역], 동으로 70리[27.491㎞] 길인 상동면(上東面)[운문면 일원], 동으로 60리[23.567㎞] 길인 중동면(中東面), 서쪽 지역에 있는 서면(西面)[각남과 밀양 청도면 일원], 종도면(終道面)[청도읍매전면 일부] 등이 그것이다. 각 면마다 상유사(上有司)·하유사(下有司)·도장(都將)·부장(副將)·도권농(都勸農) 1명씩 두어 군 행정과 군사 업무를 보좌하게 하였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소지역주의가 채택되어 전국이 23부로 나누어지자 청도는 대구부에 속하게 되었고, 다음해 지방 제도 개편으로 인한 13도제 아래에서 3등 군으로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1906년 대구군으로부터 풍각면·각남면·각북면 지역을 할양 받았고, 1912년 밀양군과의 부분적인 지역 조정 끝에 현재 행정 구역으로 고정되었다.

『경상도지리지』[1425]에 따르면, 당시의 청도 호구수는 640호에 6,718인이었으며, 토지는 절반만이 비옥했고, 풍속은 검솔했으며, 양잠에 힘썼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의하면 당시 청도의 호수가 649호, 인구가 3,361명으로 나타나지만, 17세기 편찬된 『오산지』에 의하면, 청도의 호구 수가 5,328호에 인구는 20,155명으로 불어났다.

조선 시대 군사 동원 체제인 진관제도 아래 대구도(大丘道)에 귀속되어 청도 군수가 경상좌도의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를 겸임하였다. 17세기 경 청도의 군액(軍額)은 속오군(束伍軍) 1,526명, 아병(牙兵)[대장 휘하의 병정] 380명, 별도로 조직한 별대(別隊) 142명이었다. 춘추로 군사를 훈련시키는 진장(陳場)은 군 북쪽 상율림(上栗林)에 설치되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초기 청도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 33명, 진군(鎭軍) 87명, 선군(船軍) 255명이었다. 읍성(邑城)이 군 동쪽 7리[2.749㎞] 거리에 있고, 둘레가 190보다. 성현(省峴)·유천(楡川)·서지(西之)·매전신역(買田新驛)·오서(鰲西) 등 5개 역(驛)이 있다. 봉화가 2곳인데, 청도군 남쪽에 있는 남산(南山) 봉화는 남쪽으로 밀양(密陽) 분항(盆項)에 응하고, 북쪽으로 청도군 팔조현(八助峴)에 응한다. 팔조현 봉화는 북쪽으로 수성현(壽城縣) 법이산(法伊山)에 응한다.

[토성 및 이주 사족의 활동]

청도 지역은 고려 후기 이래 대성(大姓)이 많아 다스리기 어렵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토성(土姓)은 신(申)·김(金)·백(白)·이(李)·조(曺)이며, 내성(來姓)이 최(崔)·손(孫)으로 되어 있다. 이들 토성 5개 성씨가 고려 건국 이래 청도 읍사(邑司)를 장악한 세력이었다.

고려 시대 기록에 부호장 이칙정과 치사상호장 김양신 등의 활약상이 보이고 있고, 『연조귀감』에도 백계영·김연산·김언상 등 4명의 호장 이름이 등재되어 있듯이, 김씨·이씨·백씨는 고려 건국 이래 청도의 호장직을 세습하였다. 특히 김지대는 성황당 신으로 삼았을 정도로 추앙받는 인물이었고, 청도 김씨는 그 후에도 김한귀·김선장 등의 사환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조선이 건국된 후 본읍의 토성들은 침체된 반면 타 지역에서 이주해 온 가문들이 재지 사족으로 크게 성장해 갔다. 김해 김씨·밀양 박씨·고성 이씨 등이 이주해 왔다. 그중 김해 김씨김일손·김대유 등을 배출하여 영남 사림을 영도하는 지위에 올랐다. 박하담·박하징 형제 역시 성수침이나 조식 등 당대의 도학자와 폭 넓은 교유를 통해 청도 지역의 성리학적 도통을 넓혀 갔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운룡(李雲龍)이 왜적의 소탕에 크게 기여했고, 밀양 박씨 일문에서도 14명의 의병장을 배출하여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17세기 전반 청도 향안(鄕案)을 분석해 보면, 전체 입록자 184명 중 밀양 박씨 소고공파[입향조 박건] 46명, 두촌공파[입향조 박양무] 12명, 고성 이씨 46명, 경주 이씨 20명, 의흥 예씨 8명 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청도 향촌 세력은 밀양 박씨 소고공파와 고성 이씨로 재편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토산]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 되고, 기후는 따뜻하며, 개간한 밭이 3,932결이다. 논이 약 3분의 1 정도이다. 토산물은 벼·기장·조이며, 토산품은 종이·칠·호도·홍시(紅柿)·석이[石茸]·죽피방석(竹皮方席)·여우가죽·삵가죽·사슴가죽·홍화(紅花)이다. 약재(藥材)는 황기(黃耆)·백복령(白茯苓) 등이 주로 많이 난다고 하고, 특산물로 은구어(銀口魚)가 기록되어 있다. 도기소(陶器所)가 북쪽 대곡리(大谷里)[현재의 이서면 대곡리]에 하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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