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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미의 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09
한자 金沙彌-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강래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193년 7월연표보기 - 김사미의 난
종결 시기/일시 1194년연표보기 - 김사미의 난
발생|시작 장소 청도군 - 경상북도 청도군
성격 농민 반란
관련 인물/단체 김사미|최인|고용지|이지순

[정의]

1193년 7월 고려 시대 무인 정권 시기 경상북도 청도에서 김사미가 농민들을 모아 일으킨 반란.

[개설]

1193년부터 1194년까지 약 2년 동안 청도에서 김사미를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 반란이다. 초전[지금의 울산]을 본거지로 한 효심(孝心)의 난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운 김사미의 난은 남부 지방을 대표하는 민란 중 하나이다. 김사미의 난 진압 이후에도 결집 세력들이 일정 기간 청도 운문에서 활동하였다.

[역사적 배경]

고려 귀족 사회가 문종(文宗)[1019∼1083] 재위 기간에는 전성기를 이루었지만, 이후 문신 중심의 귀족 정치로 인해 귀족 사이에 분열이 발생하였다. 인종(仁宗)이자겸(李資謙)의 난[1126년]과 묘청(妙淸)의 난[1135년]으로 문벌 귀족 사회는 더욱 동요하였고 1170년(의종 24) 무신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종식되었다.

정중부(鄭仲夫) 등이 일으킨 무신 정변(武臣政變)으로 수립된 무신 정권은 1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무신 정권 초기 치열한 정권 다툼에 따른 국정 혼란, 수탈 그리고 흉년으로 크고 작은 민란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민란은 명종(明宗)[1131∼1202] 때 서북 지역에서 시작하여 남부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서북 지역의 민란을 서적(西賊), 남부 지역의 민란을 남적(南賊)이라고 하였다. 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민란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사미의 난이다.

김사미(金沙彌)[?∼1194]의 개인적 신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사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아 인근의 농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농민 출신 반란군 지휘자가 된 김사미는 1193년 청도 운문에 본거지를 두고 다른 농민들을 규합해 강력한 반란군을 조직하였다.

[경과]

1193년 7월 김사미는 청도를 근거지로 하여 농민들을 규합한 뒤 반란군을 조직하였다. 이윽고 초전에서 일어난 효심의 난의 주동자인 효심과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그 세력을 경상도 전역으로 확대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도 관군을 동원해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하지만 초기에는 반란군의 거센 저항으로 대장군 전존걸(全存傑)이 자결하는 등 관군이 싸움에서 패배하며 밀리는 양상을 보였다.

1193년 11월 고려 조정에서는 상장군 최인(崔仁)과 대장군 고용지(高勇之) 등으로 진압군 지휘부를 바꾸고 총공세를 가하였다. 이에 1193년 12월 민란의 우두머리격인 득보(得甫)가 항복하였고, 이듬해 1194년 2월 김사미가 항복하였다. 김사미는 항복 후 진압군 군영에서 바로 참수를 당하였다. 김사미가 참수된 이후에도 효심은 1194년 4월 밀성[지금의 밀양] 저전촌 전투에서 관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1194년12월 항복하였다. 이로써 2년 동안 진행된 김사미의 난효심의 난은 관군에게 모두 진압되었다.

[결과]

김사미의 난 이 관군에게 제압당하고 끝났지만 운문 지역을 근거로 한 민란은 10여 년 동안 더 지속되었다. 김사미효심의 난이 제압된 후에도 1199년 명주[지금의 강릉]에서 민란이 일어나 삼척과 울진으로 확대되고, 이윽고 경주에서 일어난 민란과 합세하였다. 이후 진주에서 공사 노비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 시기 밀성[지금의 밀양]의 관노들이 관아의 은기를 훔쳐서 운문의 민란군에게 투항하였다. 당시 운문산 부근에 은거하던 이들을 『고려사』에서는 ‘운문적(雲門賊)’이라고 표현하였다. 운문적은 1202년 11월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 부흥을 표방하고 대규모 민란을 일으켰으며, 우두머리인 패좌(孛佐)가 운문과 울진, 초전의 무리를 이끌고 주군을 위협하였다. 이후 1203년 부흥군의 대장격인 이비가 체포되고 같은 해 7월 패좌가 죽으면서 1204년 5월 민란이 종식되었다.

[의의와 평가]

김사미를 포함한 고려 시대 농민들이 자신의 생활 안정을 위한 정부 시책을 요구하고 규합하여 큰 저항력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회 체제로 넘어가는 주요한 원동을 보여 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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