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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067
한자 八助嶺
이칭/별칭 팔조현(八助峴)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지명/자연 지명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팔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상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전구간 팔조령 - 경상북도 청도군∼대구광역시 달성군
해당 지역 소재지 팔조령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팔조리지도보기
성격 고개
높이 398m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팔조리에서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로 넘어가는 고개.

[개설]

청도군 이서면에서 달성군 가창면으로 넘어가는 여섯 개의 주요 고개, 즉 우록재, 봉화재, 팔조령, 범재, 독지재, 상원산재 중에서 가운데 있는 팔조령(八助嶺)은 가장 낮은 해발 고도 398m의 고개이다. 조선 시대 한양으로 향하는 큰길인 영남 대로의 일부분이었지만, 팔조령 고개를 넘는 도로와 터널 개통 등으로 인하여 현재는 관광 코스로 활용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대부분의 길이 진흙길이었던 것과는 달리, 팔조령 고갯길은 넓적한 돌을 깔고 그 틈새를 메운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박석(薄石) 포장길이었다고 전한다.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지만, 흙이 아닌 박석 포장길이었을 당시 이곳의 통행량과 중요성을 대변해 주기도 한다.

조선 시대까지 팔조령은 한양에서 부산을 잇는 영남 대로의 가장 짧은 직선 도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팔조령을 잇는 길은 몇 번의 변화를 경험한다. 조선 시대에는 팔조리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봉화산 봉수대 서쪽 잘록이를 경유하여 왼편 산을 끼고 내려가는 길을 이용하였다.

16세기 초 기록에 따르면 영남 대로 상 17개 군현에 165개의 원이 분포하는데, 이들 대부분은 도적떼의 출몰 및 도로의 훼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65개의 원 가운데 50개의 원이 팔조령을 비롯한 조령, 관갑천 잔도, 작천 잔도 등 해발 고도 200m 이상의 험로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아 팔조령의 험로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고갯길의 4㎞ 범위 간격으로 주막촌이 분포했던 것에 비해 조령을 비롯한 팔조령은 주막촌들이 1∼2㎞ 범위 내에서 분포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팔조령은 물자와 사람들이 지나는 도로 역할뿐만 아니라 군사적 요지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조선은 파발 제도를 강화하면서 남한산성, 가산성, 팔조령 등 군사적 전략 요지 부근의 발소에 45명의 군사를 배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대한 방어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부산에서 한양으로 이르는 영남 대로 상에 존재하는 여러 겹의 자연 방벽을 이용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영남 대로의 여덟 개 방어선 중 팔조령은 부산에서 올라오는 제3 방어선으로 대구 분지 남쪽의 팔조령과 성현이 연결된다.

팔조령의 중요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제기되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788년(정조 12) 6월 12일 기록에 따르면 선조 20년에 청도읍성을 쌓고, 청도읍 주변의 신학성·고읍성·증성 그리고 남쪽의 오혜산성 등을 묶어 방어선을 구축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중 이 전략을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결국 팔조령과 성현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대구가 함락되는 결과를 낳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상원사 쪽으로 비스듬히 길을 내어 범골 깊숙이 들어갔다 내려오는 길로 신작로가 만들어졌다. 이 두 길이 팔조령을 잇는 영남 대로의 옛길이며, 이곳을 따라서 팔조령 신당과 과객들의 쉼터 느티나무 군락지 등이 위치한다. 이후 팔조령 산마루를 넘어가는 구 지방도 911호선이 개설되었다.

팔조령을 넘어가는 영남 대로는 구 지방도 911호선과는 달리 팔조지를 지나 양원리 샛별 장터에 이르기까지 직선으로 연결된다. 이 흔적으로 팔조지 아래에는 팔조령을 넘는 과객들의 안전을 비는 팔조령 신당이 위치하고 있다. 석주사 뒤편 산등성이를 타고 직선으로 내려가는 영남 대로 주변 산기슭 도로 좌우에는 짐터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산길을 오르내린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마을 주민들이 현재도 묘소 벌초 등을 위하여 이서로 넘어가는 길로 쓰고 있다. 팔조령을 넘어 대구 방면에는 주막걸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과거 이곳에는 기생들의 치맛바람도 제법 불었다는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번화한 거리가 조성되었다고 한다.

구 지방도 911호선은 인근 주민들의 부역으로 건설되었음이 주변 증언으로 전해진다. 자동차 도로가 개설되었지만 험준한 팔조령을 넘는 것에 있어서 어려움은 많았다. 빈번한 교통사고와 함께 눈·비가 조금 내려도 미끄러운 도로로 인하여 교통이 빈번하게 통제되기도 하였다. 만원 버스는 굽은 도로를 한 번에 돌지 못하여 애를 먹기도 하였으며, 늦은 밤 이곳을 지날 때는 굽은 도로와 앞이 볼 수 없는 어둠으로 인하여 늘 사고의 위험을 염두에 두었다. 이후 사고를 줄이고 직선화를 위하여 2000년 팔조령 아래에 길이 690m의 팔조령 터널이 개통되었고, 2011년 8월 2차선이던 현재의 국가 지원 지방도 30호선이 4차선으로 확장되었다. 이 도로의 개설로 청도와 대구 달성군 가창면은 20분 정도의 시간이 단축되었으며, 구 지방도 911호선은 과거 팔조령을 기억하며 찾는 사람들의 관광 코스가 되었다.

[명칭 유래]

팔조령이라는 지명은 1760년 『여지도서(輿地圖書)』[청도군], 1834년 제작된 『청도군지(淸道郡誌)』 내 청도군 지도, 이후 제작된 『1872년 지방 지도』 경상도편 등 모든 도서에 팔조령이 표시되어 있다. 팔조령청도읍성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하며, 청도천을 건너 대구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으로 북산 봉수와 함께 대구의 경계선이 되는 지역으로 표시되었다.

정확한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팔조령은 한양에서 부산까지의 관도인 영남 대로 중에서 여덟 번째의 고개라는 설도 있고, 고갯마루에 도적이 많아 적어도 행인 여덟 명이 모여 무리를 지어 서로 도우면서 넘어야 한다는 것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이 전해진다.

[자연환경]

팔조령은 봉화산[539.7m]과 상원산[669.5m]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조선 시대 괴나리봇짐을 맨 길손들이 이 고개 밑에서 큰 숨을 한 번 쉬어야 할 정도로 높았다고 전해지며, 청도의 지명 유래집에서는 길이 워낙 벅차 화물은 소와 당나귀 등 짐승의 힘을 빌어야 했다고 전한다.

주변 자연환경으로는 소나무 군락이 압도하고 있으며, 봄이면 진달래, 철쭉 또는 고산식물로 아름답다. 상원산의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일대는 소나무 군락 외에 신갈나무 군락이 길게 뻗어 있으며, 그 주위에 리기다소나무, 낙우송 군락이 널리 분포한다.

팔조령은 어느 고갯길에서도 한눈에 모든 경치가 바라보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그 길이 굽어 이어졌으며, 정상에 오르면 아래쪽으로 양원리신원리 등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다. 팔조령 아래 화양읍 유등리에는 청도 팔경의 하나인 유호 연화(柳湖蓮花)가 있다.

[현황]

현재 팔조령에는 국가 지원 지방도 30호선이 지나며, 팔조령 간이 휴게소가 운영 중이고 그 주변에는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감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청도군 기독교 연합회에서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하며 세운 기념물이 대구 방면 도로 좌측에 세워져 있다.

팔조령을 관통하는 팔조령 터널을 지나 이서면에 들어서면 폐교된 칠곡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향토 자료관이 2013년 개관을 목표로 공사 중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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