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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737
한자 松西里碑石群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송서 9길 14-8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
집필자 채광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87년연표보기 - 송서리 비석 떼 유학 천재부 송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63년연표보기 - 송서리 비석 떼 유학 정수영 송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73년연표보기 - 송서리 비석 떼 관찰사 이 상국 휘 삼현 영세불망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77년연표보기 - 송서리 비석 떼 유학 이규환 송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77년연표보기 - 송서리 비석 떼 유학 신연한 송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928년연표보기 - 송서리 비석 떼 군수 최 후 병철 송덕비 건립
현 소재지 송서리 비석 떼 -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송서리 567지도보기
성격 선정비
양식 규수[유학 천재부 송덕비·유학 이규환 송덕비·유학 신연한 송덕비]|비좌규수[유학 정수영 송덕비]|비좌개석[관찰사 이 상국 휘 삼현 영세불망비·군수 최 후 병철 송덕비]
관련 인물 천재부|정수영|이삼현|이규환|신연한|최병철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너비,두께) 유학 천재부 송덕비 : 105㎝[높이]|47㎝[너비]|유학 정수영 송덕비: 146㎝[높이]|45.5㎝[너비]|관찰사 이 상국 휘 삼현 영세불망비 : 170㎝[높이]|48㎝[너비]|유학 이규환 송덕비 : 77.5㎝[높이]|33㎝[너비]|유학 신연한 송덕비 : 79㎝[높이]|33㎝[너비]|군수 최 후 병철 송덕비 : 125㎝[높이]|35㎝[너비]
소유자 청도군청
관리자 청도군청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송서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까지의 선정비 떼.

[개설]

풍각면 복지 회관에 한말∼일제 강점기 때 건립된 선정비 6기가 현대에 조성된 비석들과 함께 나란히 서 있다. 6기의 비석과 관련된 인물은 유학 천재부, 유학 정수영, 관찰사 이삼현, 유학 이규환, 유학 신연한, 청도 군수 최병철 등이다.

천재부(千載富)는 본관은 영양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이삼현(李參鉉)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용인, 자는 태경(台卿), 호는 종산(鐘山)이다. 1834년(순조 34) 사마시에 합격하고, 1841년(헌종 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 주서가 되었다. 1850년(철종 1) 평안도 암행어사로 내려가서 민정을 살피고 탐관오리를 징계하여 국권의 위엄을 보였다. 1862년(철종 13)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났을 때 경상도 선무사가 되어 영남 지방의 민심을 수습하고 관련된 관리들을 징치하였다. 1865년(고종 2)∼1868년(고종 5)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이후 대사성, 예조 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저서로 『종산집』이 있다.

최병철은 1929년 전후하여 청도 군수로 재임하면서 청도 향교의 대성전을 중창하였다. 정수영, 이규환, 신연한은 문헌 자료가 전하지 않아 약력을 알 수 없다.

[건립 경위]

6기의 건립 경위는 관찰사 이삼현은 흥학(興學)이고, 나머지 5기는 덕을 기리기 위해서 한말·일제 강점기 초기에 건립되었다.

천재부 송덕비는 지역민들을 위하여 구휼을 베푼 천재부의 공을 기리기 위해 1787년(정조 11) 주민들이 건립했다.

정수영 송덕비는 지역의 유지로서 지속으로 지역민을 위하여 은덕을 베푼 정수영을 위해 1863년(철종 14) 주민들이 송덕비를 건립했다.

이삼현 영세불망비는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이삼현이 청도 지역 순력 중 행한 흥학(興學)을 기념하기 위하여 1873년(고종 10) 지역민들에 의해 세워졌다.

이규환 송덕비는 신연한의 구휼과 감세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1877년(고종 14)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최병철 송덕비는 1929년 전후하여 청도 군수를 역임한 최병철이 재임 중에 청도 향교 대성전을 중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8년 풍각면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위치]

청도 공용 버스 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풍각면 복지 회관 앞뜰에 6기가 위치하고 있다.

[형태]

천재부 송덕비는 비신만 세워져 있는 규수(奎首) 양식이다. 전면에는 비명(碑銘)과 찬시(讚詩)와 간지(干支)를, 후면에는 건립 관련자들을 새겨 놓았다. 비석은 화강암 재질이며, 전체 높이 115㎝, 너비 47㎝이다.

정수영 송덕비는 농대석(籠臺石) 위에 비신이 세워진 비좌규수(碑座奎首) 양식이다. 전면에는 비명과 찬시, 측면에는 간지, 후면에는 건립 관련자들을 새겨 놓았다. 비석은 화강암 재질이며, 전체 높이 146㎝, 너비 45.5㎝이다.

이삼현 불망비는 농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형의 비좌개석(碑座蓋石) 형태이다. 전면에는 비명과 찬시를, 후면에는 간지와 건립 관련자들을 새겨 놓았다. 비석은 화강암 재질이며, 전체 높이 170㎝, 너비 48㎝이다.

이규환 송덕비는 비신만 세워져 있는 규수 양식이다. 전면에는 비명과 찬시를, 측면에는 간지를 새겨 놓았다. 비석은 화강암 재질이며, 전체 높이 77.5㎝, 너비 33㎝이다.

신연한 송덕비는 비신만 세워져 있는 규수 양식이다. 전면에는 비명과 찬시, 측면에는 간지, 후면에는 건립 관련자들을 새겨 놓았다. 비석은 화강암 재질이며, 전체 높이 79㎝, 너비 33㎝이다.

최병철 송덕비는 농대석 위에 비신이 세워진 비좌규수 양식이다. 전면에는 비명과 찬시를, 측면에는 간지를 새겨 놓았다. 비석은 화강암 재질이며, 전체 높이 125㎝, 너비 35㎝이다.

[금석문]

1. 유학 천재부 송덕비(幼學千載富頌德碑)

(전면)

수운부불인(誰云富不仁)/ 유덕우겸인(有德又兼仁)/ 연금광시인(捐金廣施仁)/ 천재송기인(千載頌其仁)[그 누가 부자이면 어질지 못하다고 하는가?/ 덕망 있으면서 또 인자함도 겸하셨네./ 돈을 내어 널리 어진 마음 베푸시니 천년토록 그 어짊을 칭송하네.]

(후면)

건륭정미구월일립(乾隆丁未九月日立)[1787년(정조 11) 건립]

2. 유학 정수영 송덕비(幼學鄭壽永頌德碑)

(전면)

세세인덕(世世仁德)/ 지공차청(至公且淸)/ 세금비납(稅金備納)/ 도조염평(賭租廉平)/ 일반분혜(一半分惠)/ 기천뢰생(幾千賴生)/ 감언편석(堪言片石)/ 중구동명(衆口同銘)[세대를 이으며 전해진 인덕은, 지극히 공평하고 청렴하네./ 부과된 세금은 제대로 내었고, 도 지세는 저렴하고 공평하였네./ 절반이나 그 혜택을 나누니, 몇 천명이 삶의 혜택을 입게 되었네./ 한 조각 비석으로 어찌 다 말하리오? 많은 사람들의 입도 비명과 같으리라.]

(측면)

동치이년계해사월립(同治二年癸亥四月立)[1863년(철종 14) 건립]

(후면)

감 이달훈 김용조 이상후(監 李達薰 金容祚 李相珝)

3. 관찰사 이 상국 휘 삼현 영세불망비(觀察使李相國諱參鉉永世不忘碑)

(전면)

포민기정(浦敏其政)/ 당발유애(棠茇遺愛)/ 연봉장학(捐俸獎學)/ 추혜비부(推惠庇부)/ 사송공전(사송공전)/ 향행손례(향행손례)/ 중구시명(중구시명)/ 편석감어(편석감어)[그 정사는 부들 자라듯 민첩하시고, 남기신 사랑은 소공의 보살핌과 같다네./ 봉록을 출연하여 학문의 권장하시고, 혜택을 베풀기를 궁벽한 사람까지 보호했네./ 선비들은 공평한 전형을 칭송하고, 마을에선 공손한 예의를 행하였네./ 뭇사람의 입이 비명이 되리니, 한조각 비석으로 어찌 다 말하리오?]

(후면)

동치십이년계해사월(同治十二年癸亥四月)// 성조도감 유학 박치규 책응 유학 장석수(成造都監 幼學 朴致圭 責應 幼學 張錫洙)// 각북현내초동이동(角北縣內初洞二洞)[1873년(고종 10) 4월]

4. 유학 이규환 송덕비(幼學李奎煥頌德碑)

(전면)

병동설식(丙冬設食)/ 정춘궤량(丁春鐀糧)/ 하미보세(夏米補稅)/ 혜하가망(惠何可忘)[병년 겨울에 식량을 마련하여, 정년 봄에 양식으로 베풀었네./ 여름 곡식을 세금으로 충당해 주시니, 그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측면)

광서오년정축팔월모일(光緖五年丁丑八月某日)// 유산립(幽山立)

5. 유학 신연한 송덕비(幼學申延翰頌德碑)

(전면)

연금시인(捐金施仁)/ 유공관국(有功官國)/ 편석내입(片石內立)/ 천재송덕(千載頌德)[돈을 내어 어진 마음 베푸니, 관청과 나라에 공을 세웠다네./ 이에 작은 비석을 세우노니, 천년토록 그 덕을 칭송하리라.]

(측면)

광서삼년정축구월모립(光緖三年丁丑九月某立)

(후면)

존위 백승학 감역 김성만(尊位 白升學 監役 金城萬)

6. 군수 최 후 병철 송덕비(郡守崔侯秉轍頌德碑)

(전면)

민기피박(民飢被雹)/ 후구전학(侯救轉壑)/ 청군품부(請郡稟府)/ 연조승락(捐助承諾)/ 맥포삼백(麥苞三百)/ 인명만천(人命萬千)/ 일편명석(一片銘石)/ 영세불연(永世不硏)[백성들이 우박을 맞은 듯 굶주리니, 군수님은 골짝에 구르는 이들을 구원하셨네./ 고을 창고 곡식 풀기를 청해오니, 곡식 내어 구조하도록 승낙하셨네./ 보리곡식 삼백석으로, 수천수만 명의 목숨을 구하였네./ 한조각 비석에 새기노니, 영세토록 갈려 없어지지 않기를.]

(측면)

무진구월일(戊辰九月日)//풍각면(豊角面)

[현황]

풍각면 복지 회관에 한말∼일제 강점기 때 건립된 선정비 6기가 현대에 조성된 비석들과 함께 나란히 서 있다. 관찰사 1기, 군수, 1기, 유학 4기다. 그 중 관찰사 이삼현과 군수 최병철 비석에는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어 비신만 있는 유학 비석에 비해 크다. 다만 두 비석에는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다. 안내판과 보호 시설은 없고, 시멘트 바닥 위에 비교적 깨끗이 관리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송서리 비석군은 지역 사회 제대로 활동상이 알려지지 않은 천재부, 정수영, 이규환, 신연한 등의 인물에 대한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비석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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