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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172
한자 松西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송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윤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 청도군 풍각면 송서동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88년 - 청도군 풍각면 송서동에서 청도군 풍각면 송서리로 개칭
성격 법정리
면적 1.33㎢
가구수 307가구
인구[남,여] 1,308명[남자 628명, 여자 680명]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풍각면소재지인 송서리는 일찍이 풍각 시장이 열렸던 풍각면의 행정 및 경제 중심지이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풍각 시장과 버스 정류장을 이용한 사람들은 인근 각북, 이서, 각남, 밀양 청도면, 창녕 십이리 사람들이었다. 특히 1960년대에는 밀양의 청도면, 창녕의 성산면, 현풍의 유가면 사람들도 풍각 시장을 이용하였다. 따라서 혼인도 이 일대에 많이 이루어 지기도 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여 지금은 재래시장이 사향 길에 접어들고 있으나 아직도 농산물거래는 많이 이용하고 있는 편이다. 풍각면사무소와 풍각 파출소, 농협, 축협, 소방관 파출소 등 주민 편의 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명칭 유래]

송서리는 송지서리(松只西里)로 기록되어 있다. 송지서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1906년 행정구역 개편 전에는 대구부 풍각현 송지서리였고 풍각현의 현(縣)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현리(縣里)이다. 풍각 초등학교가 있는 부근은 탑동(塔洞)으로 천정사(天井寺) 옛터에 통일 신라 때의 탑이 있어서 탑동이라 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신라가 가야와 전쟁을 치룰 때 신라의 왕이 직접 전장에 가기 위해서 이곳에 이르자 군사들이 사기충천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해서 그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정전사(停戰寺)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신라 때는 상화촌현에 속해 있었으며, 1768년 『대구읍지(大邱邑誌)』의 기록에는 대구부 풍각현 각북면 송지서리였다. 1895년(고종 32) 청도군 현내면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송서동이라 하여 풍각면에 편입되었다. 1930년대에 풍각 시장이 형성되면서 마을이 번성하였다. 1988년 송서동에서 송서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연 환경]

비슬산각북면 쪽에서 내려오는 청도천수월리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봉기천[부곡천], 각남면 옥산리에서 내려오는 녹명천(鹿鳴川)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을 뒤쪽에는 붕어산과 낚시산이 있으나 마을을 감싸지는 못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비교적 넓은 들이 있었지만, 면사무소와 보건지소 등이 들어서고 성곡리 저수지를 만들 때 수몰민들이 마을 앞쪽에 집을 지어서 많은 부분을 점유하여 들판을 많이 잠식하였다.

마을 앞 동산(童山)은 아이들과 어른들의 휴식 장소로 유명하였다. 특히 밤갓소는 물이 깊어서 여름철이면 아이들과 어른들이 끊임없이 물놀이를 즐기던 곳이다. 동산에는 동산계(童山契)를 맺어 정자를 짓고 정자와 부근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지금도 영풍루 오른쪽 절벽에는 당시 동산계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현황]

2012년 7월 현재 면적은 1.33㎢이며, 총 307가구에 1,308명[628명, 여 68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각남면 녹명리, 서쪽은 풍각면·현리리, 봉기리, 남쪽은 풍각면 덕양리, 북쪽은 각북면 명대리·이서면 가금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행정리로 송서리 1∼3리가 있고, 자연 마을로는 송서, 탑동, 뒷골목이 있다.

국도 20호선이 남쪽 경계를 따라 지나고 있으며, 중앙으로는 동서로 지방도 902호선이 지난다. 송서리풍각면의 행정 밀집 지역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면사무소와 농협 은행, 파출소와 보건 지소, 그리고 풍각 초등학교풍각 중학교, 풍각 전자 고등학교 등 학교가 있고 대형 마트와 재래시장이 공존하고 있다.

풍각 초등학교 체육관 건설로 인한 구제 발굴 당시 원삼국 시대의 토기와 기와 와당 등이 많이 발굴 되었다. 한때는 도로 정비 또는 상수도 시설할 때 땅을 시굴할 때마다 수많은 토기들이 나와서 개인 소장을 하기도 하고, 외지로 밀반출되기도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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