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7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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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龍城 |
영어공식명칭 | Baek Yongseong |
이칭/별칭 | 백상규,용성,진종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동석 |
출생 시기/일시 | 1864년 - 백용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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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서품 시기/일시 | 1877년 - 백용성, 덕밀암에서 혜월에게 1차로 출가·지도 받음 |
출가|서품 시기/일시 | 1879년 - 백용성, 해인사에서 2차로 정식 출가 |
활동 시기/일시 | 1886년~1940년 - 백용성, 조선불교의 주체성과 자주성 주장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백용성, 3.1운동 33인 중 1명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
몰년 시기/일시 | 1940년 2월 24일 - 백용성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2년 - 백용성,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수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0년 - 백용성, 은관문화훈장 추서 |
출생지 | 백용성 생가 -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
학교|수학지 | 덕밀암 - 전라북도 남원시 산성길 218[산곡동 421-4] |
학교|수학지 | 해인사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가야면 치인리 10] |
활동지 | 화과원 -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50 |
활동지 | 합천 해인사 용성선사 승탑 및 탑비 -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길 144-19 |
성격 | 종교인|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선농불교 주창 |
[정의]
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화과원을 기반으로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주창하고 실천한 승려.
[가계]
용성선사, 용성대종사로도 불리는 백용성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아버지는 백남현(白南賢)이며, 어머니는 밀양손씨이다. 백용성은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났으며, 출가 전 이름은 백상규(白相奎)이다.
처음 출가하였을 때 법명으로 진종(震鍾), 법호로 용성(龍成)을 받았다.
[활동 사항]
백용성은 1877년인 14세에 전라북도 남원의 교룡산 덕밀암(德密庵)의 혜월(慧月)에게 출가하여 지도를 받으면서 수행하다가 부모의 반대로 환속하였다. 1879년에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에서 정식으로 출가하였다. 전국을 떠돌며 수행하다가 1886년 9월 경상북도 선산에서 4차의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로도 전국을 돌며 당시의 선지식(善知識)[지혜와 덕망이 있고 사람들을 교화할 만한 능력이 있는 승려]을 만나 자신의 깨달음을 재점검하였다.
백용성은 일제의 병탄 이전부터 몰락의 위기에 처한 조선 불교의 중흥과 자주성을 위하여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저술하였다. 1919년의 3.1운동 때는 한용운(韓龍雲)[1879~1944]과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날인하였다.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독립 시위 폭동 혐의로 1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백용성은 수감 생활 중에 기독교 목사들이 한글로 된 성경책을 읽는 것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출옥 후에는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불경의 한글화 작업’을 주도하는 등 불교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는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조선 불교계에서도 육식과 대처(帶妻)가 만연하였다. 백용성은 조선 불교계의 자주성과 임제종(臨濟宗)[중국 당나라 때 임제의 종지(宗旨)를 근본으로 하여 일어난 종파]의 기풍을 회복하기 위하여 선학원을 개설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럼에도 기존의 조선 불교계에서는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가 없던 백용성은 해인사와 범어사에 있는 자신의 승적을 버리고 대각교(大覺敎)를 선언하며 일제의 불교정책에 완강히 저항하였다. 백용성은 당나라 백장(百丈)선사의 청규를 본받아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실천불교를 주창하였다. 이것을 위하여 1927년에는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백운산의 황무지를 개척하여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하였고, 만주의 용정에서도 ‘대각교당’과 ‘선농당(禪農堂)’을 개설하였다. 조선 불교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주창한 대각교는 1930년대 중반부터 일제의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백용성은 1940년 2월 24일 세수(歲壽) 77세로 사망하였다.
[사상과 저술]
저서로는 『귀원정종』·『수심론(修心論)』·『용성선사어록』 등이 있고, 『조선글 화엄경』을 비롯한 21종의 한글로 번역된 불경이 있다.
[묘소]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 내의 용탑선원(龍塔禪院) 서편에 합천 해인사 용성선사 승탑 및 탑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92호]가 있다.
[상훈과 추모]
백용성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헌으로 1962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고, 1990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이 추서(追敍)되었다.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는 1945년에 백용성을 위하여 용탑선원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