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3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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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川面民間人虐殺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고지수 |
종결 시기/일시 | 1952년 9월 - 1000여 명의 빨치산이 마을 약탈과 인민재판을 벌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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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
종결 장소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
성격 | 민간인 학살 사건 |
[정의]
1952년 9월 2일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일대에서 발생한 마을 약탈 및 민간인 학살 사건.
[역사적 배경]
함양군 마천면 삼정마을은 여순사건 이후 한국전쟁기[1950~1961]까지 지리산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빨치산들의 출몰로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한 군대와 경찰의 수색, 색출 작전에 의해 민간인들의 피해가 많았던 지역이다. 이 가운데 ‘마천면 민간인 학살 사건’은 1952년 9월 2일 마천면 삼정마을에서 빨치산들에 의해 마을 봉쇄가 뚫리면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약탈과 학살을 당한 사건이다.
[경과]
한국전쟁 중 함양군 마천면에 있는 당흥마을 주민들은 통나무 목책으로 3중 방어선을 구축하여 빨치산과 군경의 이중 피해로부터 마을을 방어하였다. 직경 10㎝ 이상 되는 통나무를 땅 속에 묻어 빽빽하게 세우고 새끼줄 또는 칡으로 얽어매어 통나무 성(城)과 다름없는 봉쇄선을 만들었다. 통나무 봉쇄선은 3중인 데다 겹과 겹사이가 2~3m 정도로 돌파하기 쉽지 않았다. 봉쇄선 안에는 경찰지서·면사무소·영림서지소·학교[마천국] 등의 기관과 약국, 의원, 여관, 가게 등이 있었다. 통나무 봉쇄선은 다른 마을의 청·장년과 가축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하였다. 봉쇄선 안에서 젊은 청년들이 특공대를 조직하여 방어했는데, 규모는 120~130명이었다. 마천 주민들이 평상시 신발인 짚신을 신고 전투를 벌인 까닭에 특공대는 일명 ‘짚세기부대’라는 별호를 얻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1952년 9월 2일 남부군의 이현상 부대가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지서를 습격하고 상당량의 무기를 노획한 후 마천을 향해 진격해 왔는데 병력이 1,000명 정도였다. 봉쇄선 안에서는 함양군 일대에 지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이 사실을 빨치산이 도청으로 먼저 알게 되어 봉쇄선이 뚫렸다. 가장 먼저 외마고지가 무너졌고, 봉쇄선 밖에서 싸우던 특공대원 100여 명이 희생되었다. 빨치산의 공격이 시작된 지 2일 만에 특공대와 경찰 측 무기와 전력이 바닥나면서 주력부대가 전라북도 남원군 산내 쪽으로 후퇴하였다. 봉쇄선을 지키던 주력군이 빠져나가자 통나무 봉쇄선은 쉽게 허물어져 빨치산들에 의해 점령되어 마을은 약탈되고 면서기·경찰·이장 등 일부가 생포되었다.
[결과]
후퇴한 특공대와 군경이 재무장한 뒤 마천을 수복하였으나 통나무 봉쇄선 안은 모두 탈취당한 뒤였다. 이때 강제 동원되었던 마천 주민들은 사건 이후에 부역자로 몰려 대한청년단 또는 경찰에 잡혀가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고문을 당한 무고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경찰과 청년단에 복수하기 위해 스스로 입산하여 빨치산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마천면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빨치산에 잡혀간 사람들은 모두 도마부락[지금의 마천면 군자리]으로 끌려갔는데, 이때 인민재판으로 12명이 하정부락[지금의 마천면 삼정리] 동구에 있는 솔숲으로 끌려가 총살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마천면 민간인 학살 사건은 함양군 마천면 지역의 자체 방어가 빨치산에 의해 뚫리면서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빨치산이 물러간 후에도 재무장해 들어온 군경과 특공대로부터 마천 주민들이 빨치산 내통자로 몰려 이중의 피해를 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