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B0202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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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성봉현 |
최광현(崔光鉉)[1795~1872]은 강화최씨로 공주 부전동에 입향한 덕준(德俊)의 13대 손으로 자(字)는 성약(聖若)이다. 최광현의 이름이 족보에는 최광현(崔光鉉)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44세 때의 시권에서부터 70세 때의 시권까지 최광현(崔光顯)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족보가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최광현이 사마시 제술과에 입격한 초시는 1864년 7월 29일에 실시된 고종의 등극을 축하하기는 경과(慶科) 증광시(增廣試)이었고, 성적은 차중(次中)이었고, 회시(會試)는 이소(二所)에서 치루어서 성적은 3등 제 118인 이었다. 강화최씨세보에 의하면 최광현은 초시 입격 후 사은일(謝恩日)에 절충중추부첨지(折衝中樞府僉知)에 가자(加資)되었고, 이후 1869년(己巳)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겸외위장(同知中樞府使兼五衛將)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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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현의 시권
부전동 강화최씨가의 소장 고문서 30건 중에서 시권(試券)이 16건인데, 시권의 주인공은 최광현이다. 시권을 통해 최광현이 진사과에 응시한 시기를 보면 44세 1건(1839), 54세 2건, 55세 2건, 56세 5건, 62세 1건, 63세 1건, 66세 1건, 70세 2건 등이다. 즉 최광현이 몇 살에서부터 소과인 사마시를 보기 시작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70세까지 계속하여 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에 보통 20세 초반이후부터 초시를 응시하기 시작하는 관행으로 본다면 대단한 집념이 아닐 수 없다. 가히 최씨 고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양반관료사회에서 과거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잘 웅변한다고 하겠다.
소과는 양반관료제 사회이었던 조선 사회에서는 문과(대과)에 응시하거나 성균관 유생이 될 수 있는 자격시험이었다. 그러나 소과는 이러한 기능 외에 입사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양반들은 소과를 거친 후 음직이나 천거들을 통해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지방의 현감직 등은 문과 출신자들이 기피가 심해여 음관 출신자들이 수령으로 부임하는 곳이 별도로 정해져 있을 정도이었다. 이러한 음관이 수령으로 나갈 수 있는 현들에는 대체로 소과 출신자들이 천거나 음관으로 수령이 도기도 하였다. 즉 소과는 양반들에게 사환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향촌에서 양반으로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계승할 수 있는 뒷받침이 되었다. 따라서 그만큼 양반들은 과거에 집착 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소과가 갖는 중요성 크지만 최광현이 고집스럽게 70세까지 소과에 응시한 것은 좀 예외적인 측면이 있으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최광현의 사마시 시권은 여러 장이어서 당시 초시의 관행을 알 수 있다. 시권의 상단부에는 응시한 과거의 종류와 응시시 시관이었던 상시관(上試官:監司·道伯)·부시관(副試官)·참시관(參試官)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최광현의 시권에는 상시관이 감사 등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마시 중에서 향시(鄕試)에 응시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마시의 초장(初場)은 시(詩)로 복시(覆試)는 대체로 부(賦)로 보았는데, 시의 경우에는 통상 30구을 채워야 했는데, 최광현의 시권 가운데 시가 11건으로 모두 30구를 채운 경우이다.
조선시대 과거에서 과차는 상·중·하, 이(二) 상·중·하(上·中·下), 삼(三) 상·중·하(上·中·下) 9등으로 나누어 삼하(三下) 1분으로 하여 입격(入格)으로 하고, 그 아래에 다시 次上·次中·次下·更·外의 5등으로 나누는 것이 상례였다. 최광현의 경우에 기해(己亥:1839) 차하(次下), 무오(戊午:1858) 차중(次中), 신해(신해:1851) 차상(次上), 갑인(甲寅:1854) 차상(次上), 갑자(甲子:1864) 차중(次中), 무오(戊午:1858) 차상(次上), 신유(辛酉:1861) 차하(次下) 등의 성적을 받은 시권은 불합격된 시권이었다. 그리고 신해(1851) 삼중(三中)으로 시작해서 입격권에 든 시권인 경우도 삼상(三上)은 1건, 삼중(三中) 5건, 삼하(三下) 1건 등이었고, 최광현의 시권 중 최고 점수를 받은 것은 삼상(三上)이었다. 이는 최광현의 성적이 그리 높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이것이 최광현이 70세까지 과거를 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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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현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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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현의 시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