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B02020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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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대연 |
부전동의 대표적인 세거성씨 가운데 하나인 강화최씨 가에는 약 30점의 고문서가 대대로 전해 오고 있다. 강화최씨는 부전동의 세거성씨이었던 김석견(金錫堅)의 사위로 입향하게 되었는데, 입향시기는 입향조 김석견의 손자 방(逄)의 출생년이 1508년(중종3)인 것으로 보아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전동 강화최씨 가의 고문서로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은 1699년 강화최씨 20세 최상봉이 6촌 형의 둘째아들 일향(一享)의 입양을 허락하는 예조입안(禮曹立案)이고, 가장 늦은 시기의 고문서 1882년에 최병완(崔秉完)의 산송소지이다. 따라서 강화최씨가의 고문서는 대략 16세기 초에서 19세기 말까지의 고문서이다. 소장 고문서의 종류는 예조입안(禮曹立案) 1점, 호적(戶籍) 3점, 분재기(分財記) 3점, 소지류(所志類) 7점, 시권(試券) 16점 등이다. 강화최씨 가에서 보면 20세가 되는 동입(東立;1587~1658)에서부터 병완(秉完)까지의 고문서이다.
[강화최씨의 고문서 소개(부록)]
강화최씨가의 대표적인 고문서를 종류별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예조입안(禮曹立案)
강화최씨 20세 최상봉(崔商鳳)이 6촌 형의 둘째 아들 일향(一享)의 입양을 예조에서 허락받은 예조의 입안이다. 조선시대에는 입양을 위해서는 본 고문서에서처럼 입양을 하고자 하는 최상봉(崔商鳳)이 적처에서 자식이 없어 같은 성씨 6촌 형 최영망(崔英望)의 둘째 아들 일향의 입양을 허락해 달라는 소지를 내고, 그리고 육촌동생 최영망이 자신의 둘째 아들 일향을 최상봉에게 입양하는 것을 동의 하는 소지, 이를 문장(門長) 최지준(崔之俊)이 확인한 조목 등을 제출하면, 이를 예조에서 적실한지 검토하여 최상봉에게 최영망의 둘째 아들 일향의 입양을 허락하여 주는 예조입안(禮曹立案)을 내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강화최씨 족보에는 최상봉의 명이 동립(東立)으로 되어 있고, 초명은 상봉(商鳳)이라 적고 있다. 그러나 본 예조입안이 발급되던 1699년에도 최상봉의 이름은 동립이 아니고 상봉으로 되어 있다. 이는 최상봉이란 성명을 예조입안의 발급시기인 1699년까지는 사용하다가 이후에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족보에 최동립은 1587년에 출생하여 1658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동립이 사망 후 예조입안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예조입안에는 최동립이 양자를 위해 소지를 올리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족보에 최동립의 생몰년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고문서는 한 집안의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확인해 주는 좋은 자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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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봉의 예조입안
호적(戶籍)
부전동 강회최씨 가의 호적은 모두 3점이다. 첫째 호적은 공산현(公山縣)[지금의 공주]에서 공산현 우정면(牛井面) 남산리(南山里) 3통 3호에 거주하였던 강회최씨 22세 최계현(崔繼賢)[예조입안에 의하여 입양된 일향(一享)의 아들]이 31세 되던 해인 1723년에 계묘(癸卯1:723)년의 호구장에 의거 등급하여 발급받은 준호구(準戶口)이다. 본 준호구에는 많은 사환노비질(使喚奴婢秷)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강화최씨 가의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호적은 1871년에 공주 우정면 성주동(性珠洞)에 거주하였던 가선대부 용양위 호군 최광현(崔光鉉)이 공주부에 제출하였던 호구단자이다. 세 번째 호적은 반탄면(半灘面) 견산리(見山里) 이봉조하택(李奉朝賀宅) 산직(山直) 최윤이(崔潤伊)가 44세 때 공주부에 제출하였다가 돌려받은 호구단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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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계현의 준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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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현의 호구단자
분재기(分財記)
분재는 3점인데 별급문기(別給文記)이다. 별급문기란 부나 모, 조부, 조모, 숙부 등이 재주(財主)가 되어 자기 앞으로 전래되었거나 사들인 재산을 자기 의사에 따라 임의로 분재하는 것을 말한다. 대체로 별급의 사유는 자손들의 과거에 급제, 신혼, 자녀출산, 시병 등을 이유로 자녀에게 별급해 주는 것이 보통이다. 별급할 때에는 재주나 증인의 동의(着書)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별급문기는 신혼별급(新婚別給)으로 강화최씨 22세 계현(繼賢)[1693~1738]이 아들 후대(後大)[1716~1773]의 처인 평택임씨(平澤林氏)[1713~1738]에게 별급한 것이다. 별급사유는 신혼별급으로 후대가 평택임씨를 자부로 들이면서 자신도 독신이고, 아들도 하나만 두어 누대에 걸친 봉사(奉祀)가 위태로웠는데, 지금 조상에 제사를 지낼 극히 현철한 자부를 얻은 기쁨으로 자부에게 노비와 토지를 별급한 문기이다.
두 번째 별급문기는 1748년에 강회최씨 22세 계현(繼賢)[1693~1738]의 처 평강채씨(平康蔡氏)[1692~1762]가 장손자인 백복(百福)[1733~1753]의 처로 안동권씨(安東權氏)[1733~1813]를 맞이하면서 별급해준 별급문기이다. 별급사유는 과부가 된 평강채씨가 장손자의 손부로 현철한 인물인 권씨를 맞이하여 집안의 봉사(奉祀)를 맡을 손부를 얻은 기쁨으로 노비와 토지를 별급해 준 것이다. 본 별급문기의 재주는 평강채씨이고, 필집은 아들 후대(後大)[1716~1773]이었다.
세 번째 분재기는 1748년에 강회최씨 23세 후대(後大)[1716~1773]가 아들 백복의 처로 안동권씨를 맞이하면서 무성산 아래에 있는 토지와 노비를 별급을 한 문기이다. 즉 백복의 처 안동권씨는 시집을 오면서 시가의 시할머니와 시아버지로부터 신혼별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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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계현이 자부에게 별급한 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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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채씨가 손부 안동권씨에게 별급한 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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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대가 자부인 안동권씨에게 별급한 문기
소지류(所志類)
첫 번째 소지는 강화최씨 23세 최후대(崔後大)가 1745년에 자신의 친산이 공주 사곡면 김음치면에 있는데, 정월 28일 밤에 근노미의 사촌 박영재(朴英才)·순재(順才) 놈이 나의 어머니 친산 금양(禁養)의 곳에 투장을 하였으니 시정해 달라는 소지이다. 두 번째 소지는 최후대의 둘째아들 최백능이 1800년에 8대조와 6대조 산소가 있는 산과 관련된 산송이다. 세 번째 소지는 1868년에 우정면 부전(浮田)의 최흥교(崔興敎)와 광현(光鉉)이 올린 소지이다. 내용인즉 증조모의 산소가 사곡면 운정리에 있는 산 아래에 있었으나 근 백 년 동안 타인이 입장(入葬) 하는 폐단이 없었는데, 산 아래 사는 서백순(徐百淳)이 백호(白虎)의 30보도 안 되는 곳에 투장하였으므로 시정해 달라는 것이다. 네 번째 소지는 1882년에 최병완이 선영의 산소를 환추하기 위하여 3월 초사흘에 소지를 내었는데, 성주께서 대질을 위하여 출두하라 하여 삼문아래에서 3일을 기다렸으나, 상대방이 나오지 않으므로, 농사일을 놓칠 우려가 있으니 잡아서 나오게 해달라는 소지이다. 다섯 번째 소지는 1882년에 최병완이 조모와 백모를 모시기 위해 팔은 노비를 환퇴해 달라는 소지이다. 여섯 번째 소지는 1882년에 최병완이 이노계(李老系)와 산송에서 이겨 산가(山價)로 백량을 지불받기로 하였으나, 노계가 80냥만을 내겠다고 하여 인정상 어쩔 수 없어서 허락하였으니 이계노를 방송해 달라는 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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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교와 최광현이 올린 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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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환이 올린 소지
시권(試券)
시권은 모두 16건으로 최광현(崔光鉉)[1795~1872]이 44세에서부터 70세를 지나기까지 부단히 과거를 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령별 횟수를 살펴보면 44세에 1건, 54세 2건, 55세 2건, 56세 5건, 62세 1건, 63세 1건, 66세 1건, 70세 2건 등으로 나타났다. 모두 진사시의 초장·중장·종장에 걸쳐 본 시권이었다. 이는 최광현이 과거에 얼마나 집착을 하였나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