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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1066
한자 學一
이칭/별칭 원응,봉거
분야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이종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052년연표보기 - 학일 청주에서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062년 - 학일 출가하여 진장의 제자가 됨
출가|서품 시기/일시 1064년 - 학일 구족계를 받음
활동 시기/일시 1085년 - 학일 승과 합격
활동 시기/일시 1098년 - 학일 의천이 원각경 법회를 열고 부강사로 초청했으나 사양함
활동 시기/일시 1106년 - 학일 삼중 대사가 됨
활동 시기/일시 1113년 - 학일 내제석원에 주석
활동 시기/일시 1114년 - 학일 대선사가 됨
활동 시기/일시 1122년 - 학일 왕사에 책봉됨
활동 시기/일시 1129년연표보기 - 학일 운문사에 주석하며 운문사 중흥에 크게 기여
몰년 시기 1144년연표보기 - 학일 운문사에서 입적
출생지 학일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활동지 구산사 - 경기도 개성시 고려동 송악산
활동지 내제석원 - 경기도 개성시 고려 왕궁 밖
활동지 안화사 - 경기도 개성시 자하동 송악산
활동지 운문사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지도보기
성격 승려
성별
대표 경력 국사

[정의]

고려 전기 청도 운문사를 중흥시킨 승려.

[개설]

학일(學一)[1052∼1144]은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선승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충청북도 청주 출신이다. 성은 이씨(李氏), 자는 봉거(逢渠)로 이응첨(李應瞻)의 아들이다. 왕사(王師)로 책봉되었으나 입적 후에 국사(國師)로 추증되고, 시호를 원응(圓應)이라고 했다. 청도 운문사에 일생 행적을 담은 원응 국사비(圓應國師碑)[보물 제316호]가 부분적인 파손을 입은 채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활동 사항]

1062년(문종 16)에 승려가 되어 진장(眞藏)의 제자가 되었고, 1064년(문종 18)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혜함(惠含)의 문하에서 선지에 통달하였고, 경률론(經律論)에 대하여 깊이 연구했으며, 특히 『대반야경(大般若經)』에 박통하여 반야 삼매의 경지에 도달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의 질병까지 고쳐주었으므로 크게 존경을 받았다.

1085년(선종 2)에 광명사(廣明寺) 선불장에 나가 승과(僧科)에 합격하였다. 의천(義天)이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자 선종의 승려들이 대부분 천태종으로 옮겨갔지만, 여러 번에 걸친 의천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홀로 선종(禪宗)을 지켰다. 1098년(숙종 3)에 의천이 홍원사(弘圓寺)에서 원각회(圓覺會)를 개설하고 부강사로 삼고자 했을 때도 역시 사양했다. 숙종의 어린 아들이 병이 나자, 이를 고쳐준 것이 계기가 되어 법주사에 머물렀다.

1106년(예종 1)에 삼중 대사(三重大師)가 되었으며, 가지사(迦智寺)와 구산사(龜山寺) 등지에서 머물렀다. 1108년(예종 3)에 선사(禪師), 1114년(예종 9)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그 무렵을 전후하여 내제석원(內帝釋院)과 안화사(安和寺) 등지에서 주석했다. 1122년 예종이 병중에 내전으로 불러 왕사(王師)로 삼으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예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한 뒤에야 명경전(明慶殿)에서 제자의 예를 행하고 왕사로 책봉되었다. 1123년(인종 1) 봄과 여름에 걸쳐 큰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학일이 비를 빌자 큰 비가 내렸다.

1126년(인종 4) 늙었음을 이유로 운문사(雲門寺)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129년(인종 7) 드디어 운문사로 물러가자 수많은 학자들이 찾아들었다. 학자들에게 학일은 ‘자기를 밝히는 일을 급무(急務)’로 삼도록 가르쳤다. 운문사에 주석하는 동안에도 왕으로부터 갖가지 물품을 비롯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아, 운문사를 중흥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다. 1142년(인종 20) 산불이 크게 나 대중들이 총동원되었으나 끄지 못했는데, 학일이 산을 향해 축원하자 갑자기 비가 내려 불이 꺼졌다는 일화도 전한다. 1144년(인종 22) 11월 15일 병석에 누워 제자들에게 “그대들은 도력을 기르는데 전념하고 명리를 탐하지 말라.”라는 훈계를 내렸고, 12월 9일 임종게(臨終偈)를 설하고는 단정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원응 국사의 저술로 전해지는 것이 없고, 일생 행적을 담은 비석에도 저술과 관련된 내용이 없어, 원응 국사의 사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다만 원응 국사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각 국사 의천이 주도한 천태종의 창립을 반대하고 선종을 지킨, 선종 계열의 고승이었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원응 국사의 행적에서 선교 융합(禪敎融合)의 흔적이 보이기도 하며, 중생 교화의 보살행과 이적을 부르는 신승(神僧)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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