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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안생 소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828
한자 朴安生所志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1603년 2월 - 박안생 「박안생 소지」 작성
작성 시기/일시 1603년 4월 - 박안생 「박안생 소지」 작성
발급 시기/일시 1603년 2월연표보기 - 박안생 「박안생 소지」 청도 군수에게 제출
발급 시기/일시 1603년 4월연표보기 - 박안생 「박안생 소지」 순찰사에게 제출
소장처 경주 독락당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00-1
성격 소지
관련 인물 박안생
용도 진정|청원
발급자 박안생
수급자 청도 군수|순찰사

[정의]

1603년 밀양에 거주하는 박안생이 청도 군수와 순찰사에게 보낸 소지 2점.

[개설]

박안생 관련 고문서는 1603년 2월의 소지(所志), 1603년 4월 4일 관문(關文), 1603년 4월 소지로서, 점련(粘連)되어 있다. 2월의 소지는 박안생이 청도 군수에게 제출한 것이며, 관문은 청도 군수가 현풍 현감에게 재판을 이송하며 보낸 것이다. 4월의 소지는 박안생이 순찰사(巡察使)에게 보낸 것이다. 2013년 현재 경주 독락당에 소장되어 있다.

[제작 발급 경위]

밀양에 거주하는 정로위(定虜衛) 박안생(朴安生)이 제출한 소지는 모두 2점이다. 이들 소지는 청도 군수와 순찰사에게 보낸 것으로 정소사(鄭召史)와 박숙(朴琡)의 비리 사건 즉, 인정(人丁)의 누락과 죄인의 도망, 문서의 위조 및 관물(官物)의 사사로운 사용 등에 관한 것이었다. 정소사와 박숙은 관청의 출두 명령을 받고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출석을 미루었고 이로 인해 재판이 번번이 지연되었다. 이에 사건을 제보한 당사자인 박안생은 주어진 군역(軍役)[주사장(舟師長)]의 고역(苦役)과 재판 지연으로 인한 마음의 고충이 더해져서 더 이상 재판을 끌고 갈 수 없기에 소송을 빨리 끝내주길 요청하고자 이 소지를 작성하였다.

[형태]

총 3점이 1장으로 점련된 것이다. 전체 크기는 세로 41㎝, 가로 100㎝이며, 글자는 한자와 이두를 함께 쓰고 있다.

[구성/내용]

1. 1603년(선조 36) 2월의 소지

박안생은 정로위로서 병역을 지고 있었다. 여기에 새로이 주사(舟師)[수군]의 장(長)을 맡으면서 신역(身役)이 매우 피곤한데다,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던 소송도 결론도 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여기에 소송 중이던 정소사가 계속해서 명을 어기고 재판에 참석하지 않자, 청도군에서 결장(決杖)을 위해 정소사를 잡아 오던 중 도망하여 그 이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박숙이라는 자는 관의 거듭된 출석 명령에도 여러 가지 핑계를 들어 막무가내로 행동하니 힘없는 자신으로서는 그를 잡아들일 수 없어 매우 답답해하고 있었다. 나아가 박숙은 자신의 호세(豪勢)를 믿고 박안생을 달래고 겁박하며 거짓 증언을 하도록 유도하는 등의 행동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에 박안생은 이러한 사실을 청도 군수에게 하소연하면서 현풍현에 이문(移文)하여 현재 진행 중인 소송이 끝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2. 1603년(선조 36) 4월의 소지

정로위 박안생은 정소사가 재판을 미뤄오던 중 청도 군수의 명으로 결장을 위해 호송되어 오다 중도에 도망하여 잡을 수 없게 된 사실과 박숙이 노비 매매 문서를 위조하여 매득(買得)한 사실, 또한 청도 군수의 두 차례에 걸친 재판 출석 명령에도 이를 무시하다가 사건이 이문(移文)되어 현풍 현감이 세 번째로 부르자 자신이 위조한 사실 등이 드러나는 것을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재판을 피하고 있다가, 몸종이 잡히고 출석을 거듭 재촉하자 다짐[고음(侤音)]을 통해 자신이 노비 문제에 관계하지 않았음을 밝혔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지 않으려고 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나아가 박숙의 죄를 일일이 말하기 어려울 만큼 많지만, 지금은 청도 군수의 인신(印信)을 위조하는 죄를 범하였음을 거듭 밝히고 있다. 이어서 박안생은 주사의 고역과 지금까지 재판이 이어져 오면서 심신이 지쳐 있기에 순찰사가 현풍 군수의 초사, 청도 군수의 관문, 관문에 점련된 소지를 세세히 살펴 현풍 현감에게 입안(立案)을 성급(成給)하는 일을 결정하여 궁민(窮民)의 애한이 풀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박안생 소지」임진왜란 직후인 1603년에 작성된 것이다. 이 시기는 전후 복구를 위하여 민간의 모든 역량을 모아 국가를 다시 세우기 위해 노력하던 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세력을 믿고 관권[공권력]을 무시하고, 불법을 자행하면서 재산을 증식하거나 향민들을 착복하는 자들이 성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관에서 판결한 제음(題音)을 보면 양반 사족에 대한 직접적인 처벌보다는 회유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순찰사는 송관(訟官)[현풍 현감]이 증빙 서류들을 신속히 상고(相考)하여 판결을 확정하고 일부러 소송을 끌고 가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청도 군수는 박숙의 몸종을 가두고 재판 참석을 독촉하라고 형부(刑部)에 지시하고 있다. 이는 양반들의 생활과 관련된 것으로 양반들은 몸종이 없으면 집 밖으로 출입을 하지 않으므로, 박숙의 행동을 제약하여 재판 참석을 독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박안생 소지는 17세기 초의 향촌 사회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 『고문서 집성』 65-경주 옥산 여주 이씨 독락당 편(한국 정신문화 연구원, 2003)
  • 한국 고문서 자료관(http://archive.kostm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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