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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741
한자 德村里碑石群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덕촌리 1143-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채광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40년 - 김명진 출생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31년 - 홍용관 출생
현 소재지 덕촌리 비석 떼 -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덕촌리 1143-2
성격 선정비
양식 비좌규원(碑座奎圓)
관련 인물 김명진|홍용관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너비,두께) 김명진 선정비 : 115㎝[높이]|37㎝[너비]|12㎝[두께]|홍용관 선정비 : 112㎝[높이]|41㎝[너비]|12㎝[두께]
소유자 청도군청
관리자 청도군청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덕촌리에 있는 조선 시대 비석 떼.

[개설]

김명진(金明鎭)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치성(稚誠)이며, 1840년(헌종 6년)에 출생했다. 1870년(고종 7) 정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후 충청좌도 암행어사, 동부승지, 대사성(大司成), 경기도 관찰사, 경상도 관찰사, 이조 참판, 공조 판서 등을 두루 거쳤다. 특히 관찰사로 재직 중에 올린 장계의 내용에는 수취 체제의 혼란상이 상세히 적혀 있어서 당시, 사회상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홍용관(洪用觀)의 본관은 남양, 자는 응경(應卿)이며, 1831년(순조 31) 충청북도 괴산에서 출생했다. 1882(고종19)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했고, 음관(蔭官)으로 영동 현감, 대구 판관, 영천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건립 경위]

김명진은 1888년(고종 25)부터 1890년(고종 27)까지 경상도 관찰사에 재직하면서 흉년·재해를 당했을 때 조정에 장계를 올려서 조세를 감면 받고, 1,000결을 가획(加劃)받아 경상도 주민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1889년(고종 26)에 선정비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대구 도호부 판관 홍용관김명진을 수행함으로써, 김명진의 공에 편승하여 함께 비석이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

청도군 각북면 덕촌리 지천교에서 점말 마을로 들어가는 길옆에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형태]

비석의 형태는 비좌는 시멘트로 덮여 있고 비신만 남은 비좌규원(碑座奎圓) 양식이다. 전면에는 비명(碑銘)과 찬시(讚詩)를, 후면에는 간지(干支)를 각석해 놓았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높이 115㎝[김명진]·112㎝[홍용관], 너비 37㎝[김명진]·41㎝[홍용관]이며, 두께는 모두 12㎝이다.

[금석문]

1. 김명진 선정비

(전면)

순상국 김 공 명진 휼민 선정비(巡相國金公明鎭恤民善政碑)

(후면)

기축(己丑) 10월

2. 홍용관 선정비

(전면)

판관 홍 후 용관 휼민선정비(判官洪侯用觀恤民善政碑)

(후면)

기축(己丑) 10월

[현황]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김명진은 경상도 지역에서 경상북도에 12기, 경상남도에 4기 등 총 16기가 현존하는 선정비 최다 입비자이다. 홍용관도 청도 외 영천 조양각에 ‘군수 홍 후 용관 영세 불망비(郡守洪侯用觀永世不忘碑)’가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대구와 영천에서 수령을 지낸 홍용관의 경우 영천 군수 시절 학정으로 인해서 영천군민 수천 명이 봉기하는 민란 발생을 야기한 인물이다. 그는 이미 민란 이전 부임한 여러 고을에서도 백성을 괴롭히고 많은 돈을 탐오(貪汚)하여 원한을 싼 경험이 있는 자로 선정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관찰사 김명진과 선정비가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1888년 경상도가 혹심한 재해를 입자 관찰사 김명진이 조세 감면을 요청하여 감세 1,000결을 배당받아 감세 조치를 취한다. 이때 홍용관김명진을 수행하면서 그의 공로에 편승하여 함께 비석이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선정비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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