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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회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69
한자 東進會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1년 1월 27일연표보기 - 동진회 사건, 동진회 결성
종결 시기/일시 1943년 9월연표보기 - 동진회 사건, 동진회 활동 일제 경찰에 발각, 관련자 50여 명 체포
발단 시기/일시 1942년 2월 15일 - 동진회 사건, 하부 조직 농민회와 소년 독성회 조직
전개 시기/일시 1944년 12월 24일 - 동진회 사건, 회원 10여 명 기소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1월 8일 - 동진회 사건, 허남귤 부산 형무소에서 옥중 순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6월 2일 - 동진회 사건, 이길우 부산 형무소에서 옥중 순국
발생|시작 장소 동진회 사건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면 유호리
성격 독립운동|항일 운동
관련 인물/단체 이형우|백영목|이상도|허남귤|김용덕|박정근|최선호|이인우|이상학|이길우|박상노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유호리에서 동진회의 회원들이 벌인 항일 지하 운동.

[개설]

1941년 1월 27일에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면 유호동(楡湖洞) 출신의 허남귤, 이길우 등 11명의 20대 청년들이 독립운동 단체인 동진회(東進會)를 조직했다. 동진회는 재만 독립운동 단체와 연통(連通)하면서 항일 지하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1943년 9월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관련자 50여 명이 체포되었다.

[역사적 배경]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 폭압 정치와 대륙 침략 전쟁의 병참 기지로서 지배와 수탈 정책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1930년대 이후 국내 항일 독립운동의 지속적인 전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20년대 조직되어 활동했던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은 일제에 의해 해체·소멸되었고, 1930년대 제국주의 전시 체제가 강화되면서 1932년을 고비로 모든 독립운동은 비합법적인 지하 조직으로 전환되어갔다. 더욱이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독립운동의 전개는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기간 중 청도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으로는 1931년 11월 18일 일본 군용 열차 전복 의거와 1941년 2월 조직되어 1943년 7월 발각된 동진회의 활동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경과]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일제의 제국주의 폭압 정치와 대륙 침략전의 전시 체제가 한층 고조되고 있었다. 1941년 1월 27일 청도군 청도면 유호동의 20대 청년들이 설을 맞이하여 속속 귀향하였다. 이들 귀향 청년들과 마을에 남아 있던 청년들은 정미소를 경영하고 있는 박상노(朴相老)의 집에 모였다. 당시 보성 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형우(李亨雨), 철도 운송직에 종사하고 있던 백영목(白泳穆), 만주에서 귀향한 이상도(李相道), 충무에서 한약방 견습생으로 있던 허남귤(許南橘), 마을에 남아 있던 김용덕(金龍德)[유천 공립 보통 학교, 제5회], 박정근(朴丁根)[유천 공립 보통 학교, 제3회), 최선호(崔善鎬)[유천 공립 보통 학교, 제5회], 이인우(李麟雨)[유천 공립 보통 학교, 제4회], 이상학(李相鶴)[유천 공립 보통 학교, 제4회], 이길우(李吉雨)[유천 공립 보통 학교, 제4회], 박상노[유천 공립 보통 학교, 제4회] 등 11명이었다.

이들은 “오늘 이 자리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뜻 있는 모임이 되게 하자”는 제의를 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왜놈을 거꾸러트리자는 뜻에서 회명을 동진회(東進會)로 정했다. 회장에 허남귤, 총무에 이길우가 추대되었다.

동진회는 월 1회 정기 모임을 갖고 각자의 활동을 분석하고, 수집한 정보를 교환하기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독서와 토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배양하기 위한 학습도 실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1941년 7월 만주로 돌아가는 이상도에게 재만 독립운동 단체와 연통하고, 항일 투쟁의 방략(方略)을 지령받기로 하였다.

1942년 2월 15일 설에 동진회 회원들이 다시 모였다. 이들은 본격적으로 지하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하부 조직인 농민회(農民會)와 소년 독성회(少年獨成會)를 조직하였다. 1942년 10월 농민회는 이태우(李泰雨)[유천 공립 보통 학교, 제1회], 이현수(李鉉守), 장동주(張東周), 이기우(李己雨)[유천 공립 보통 학교, 제2회] 등이 농민들을 선도하여 일제의 강제 공출 반대, 학병·지원병의 모집 반대, 신사 참배 거부 투쟁, 악덕 관리의 고발, 배급 부정의 폭로 등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대항하였다.

소년 독성회는 이상탁(李相卓), 이희우(李喜雨)[1943년 당시 18세, 유천 공립 보통학교 2년], 박진노(朴珍老)[1943년 당시 16세, 유천 공립 보통학교 3년), 허원구(許元九), 허태근(許泰根) 등 15명으로 조직되었다. 소년 독성회는 16∼17세의 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주입시키고, 유사시 행동 대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한편 동진회는 일제의 군수품 수송을 방해할 목적으로 철도, 경찰, 관공서, 은행 등 일제의 통치 기관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 1943년 9월 충무에 있던 회장 허남귤과 연락을 하고 있던 만주의 이상도로부터 독립운동 단체에서 폭탄을 배정받았으니 인수하라는 서신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허남귤이 만주로 가던 중 체포되어 통치 기관 파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결과]

1943년 9월 허남귤은 충무를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만주로 향하던 중, 대전에서 경남 경찰부 고등과 외사계 형사 유복문(柳福文)에게 체포되었다. 또 동진회에 관련된 청년 및 소년 50여 명이 체포되었다. 동진회원 50여 명 중 대부분이 방면되고, 10명은 1944년 12월 24일 기소된다. 이중 허남귤은 1945년 1월 8일, 이길우는 1945년 6월 2일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부산 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이상도는 다행이 수사 기관에 잡혀가지 않았고, 기소된 나머지 7명은 공판 계류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말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항일 독립운동의 전개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동진회 의거는 재만 독립운동 단체와 서로 연락을 통하고, 항일 지하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일제에게 큰 경각심을 느끼게 했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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