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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35
한자 獨立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정의]

1894년부터 1945년까지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국권 회복 운동.

[개설]

청도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은 대한 제국기의 의병 운동과 계몽 운동, 1910년대 국내외 항일 투쟁, 1919년 3·1 운동, 1920년대의 민족 운동으로서 청년 운동·농민 운동·사회 운동·신간회 운동, 그리고 1930년대 이후 독립운동으로 동진회 의거 등이 있었다.

[개항기의 청도 지역의 실태]

청도 지역은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1881년의 영남 만인소 운동과 1894년의 동학 농민 항쟁으로 대표되는 위정척사 운동이나 반제 반봉건운동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청도 사람들도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재지 사족을 중심으로 창의하였던 역사적 사실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고,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이 점증하면서 제국주의 침략의 시대적 상황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과 그의 아들 진계(進溪) 박재형(朴在馨)이다. 박시묵은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의병 창의를 도모하였고, 박재형은 1900년 8월 의병으로 출전하여 거제의 부인포 해상에서 순국하였다고 한다.

[대한 제국기 국권 회복 운동]

대한 제국 시기 일제의 침략 과정에서 전개된 청도 지역의 국권 회복 운동은 의병 운동과 계몽 운동이다. 청도 지역은 의병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전기 의병에 참여한 사례나 관련 사료는 없지만, 1905년 이후 전개된 후기 의병에서 청도인의 활동이 나타나고 있다. 산남 의진에 투신하여 운문산을 중심으로 운문·산내 지역 일원에서 일본 군경의 탄압에 대응하여 유격전을 벌인 인물이 있었다. 그 중 1907년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운문면 공암 출신의 의병장 윤만파(尹萬坡)각남면 일곡 출신의 의병장 최한룡(崔翰龍)이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대한 제국 시기 청도 지역의 계몽 운동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계몽 운동 단체 지방 지회인 대한 자강회 청도 지회운문면에서 조직된 운산 친목회(雲山親睦會)간친 교육회(懇親敎育會), 그리고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결성된 청도군 국채 보상 의연회(淸道郡國債報償義捐會)의 활동이 주목된다.

신교육 구국 운동 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선각적인 유림에 의해 10개의 사립 학교가 설립된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경우이다. 특히 1898년 3월 설립된 대성면 유천리의 유천 학교(楡川學校)와 1907년 11월 설립된 운문면 신원리의 문명 학교(文明學校)는 주목된다.

[1910년대 국·내외 항일 운동]

청도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은 1910년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국내 독립운동으로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거부했던 유생 성기운(成璣運)김달(金達)이 주목된다. 이들은 간재 전우의 문인으로 경상도의 다른 지역과 비교된다.

1910년대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했던 이정희(李庭禧)·홍주일(洪宙一)·김유덕(金裕德)·김유경(金裕經)·최태석(崔泰錫)·최태욱(崔泰旭) 등 선각적인 인사들의 활동도 주목된다. 한편 국외 독립운동으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참여했던 예대희(芮大禧)의 활동도 눈길을 끈다.

[1919년 3·1 운동과 독립 청원 운동]

3·1 운동 이 발발하자 청도군 7개 지역에서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고, 파리 만국 평화회담에 대한 독립 청원 운동이 벌어졌다.

대성면 유호리 만세 시위운동과 일본인 공격, 운문면의 만세 시위운동과 일본 경찰 구타 의거는 평화적인 만세 시위가 일제의 탄압에 대응하여 무력 시위로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이 된다. 유림의 독립 청원 운동에 참여하였던 유생 김정기(金定基)소눌 노상직심재 조긍섭의 제자로 스승인 노상직의 뜻에 따라 동문들과 함께 독립 청원서에 서명하였다.

[1920년대 민족 운동]

1920년대 청도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에 걸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청도 지역에서 민족 운동으로서 사회 운동을 각 부문에 걸쳐 전개하였다.

국내 독립운동은 김유덕신민사(新民社), 이정희조선 독립 운동 후원 의용단, 홍재범(洪在範)대한민국 임시 정부 독립 공채 모집 및 워싱턴 회의 독립 청원, 윤병권(尹炳權)의 제2차 유림단(儒林團) 군자금 모집, 김진효(金鎭孝)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다물단(多勿團)의 군자금 모집 등이 주목된다. 국외 독립운동으로는 윤치언(尹致彦)의 진주 청년 친목회, 김인제(金仁濟)의 길림성 군정서 부속 흥업단, 강수영(姜壽永)의 만주 독립운동 등이 주목된다.

청도인들은 국내에서 이들 단체와 관련을 맺고 군자금과 단원 모집 등을 펼쳤으며, 해외에 망명하여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특히 1924년부터 1925년까지 청도군 운문면 출신의 인사들이 북경에서 조직된 국민당 및 다물단과 연계하여 독립군 자금을 모집·제공한 혐의로 체포·송치된 다물단 사건이 주목된다.

1920년대 민족운동으로서 사회 운동은 청년 운동, 사회주의 운동, 신간회 운동, 소년 운동, 소작 운동, 형평 운동 등 각 부문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30년대 이후 민족 운동]

1930년대 이후 국내 독립운동으로 1931년 청도면 고수동에서 일어난 군용 열차 전복 의거가 있었으며, 1943년 청도면 유호리에서 조직된 동진회(東進會)가 만주 독립운동 단체와 기맥을 통하고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대구 사범 학교 비밀 결사 연구회와 다혁당(茶革黨)에 참여한 안강진, 최태석, 이종악 등의 활동도 주목된다. 국외 독립운동으로는 1940년대 일본군을 탈출하여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던 한일근, 김해득, 윤봉갑, 손기달, 김의명, 박종락, 박기수, 반양환, 김원진 등의 활동이 있었다.

1920년대 만주에서 통의부와 의군부, 1930년대 조선 혁명군에 참여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던 박대호와 그의 동생 박영호, 그리고 조선 혁명군 양세봉 장군 휘하에서 항일전에 참가하였던 최운구 등의 활동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청도 지역에서는 1930년대 이후 국민 총동원령[국민 징용령]에 대한 반대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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