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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물단 군자금 모집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68
한자 多勿團軍資金募集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4년 1월 - 다물단 군자금 모금 사건, 서동일이 윤영섭을 방문해 군자금 모집하고, 윤병채, 윤병일 등 국민당 가입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5년 1월 8일 - 다물단 군자금 모금 사건, 서동일이 윤병채, 윤병일 등과 군자금 모금 계획 논의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5년연표보기 - 다물단 군자금 모금 사건, 서동일이 다물단 선언서를 보여주며 군자금 모집
종결 시기/일시 1925년 6월 - 다물단 군자금 모금 사건, 서동일, 배천택, 이종호, 윤영섭, 윤병채, 윤병일, 최성희 등이 제령 위반 혐의로 붙들려 검찰에 송치
성격 독립운동|항일 운동
관련 인물/단체 국민당|다물단|서동일|배천택|이종호|윤영섭|윤병채|윤병일|최성희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서동일이 1925년 다물단의 군자금 모집을 주도하다가 체포된 사건.

[개설]

다물단(多勿團)은 1925년 4월 14일 북경에서 조직된 항일 비밀 운동 단체이다. 1923년 3월 배천택(裵天澤), 김창숙(金昌淑) 등이 조직한 국민당(國民黨)이 항일 운동에 직접 뛰어들기 위해 1925년 4월 북경 마사묘(麻四廟)에서 조직하였다. 이 단체의 중심인물은 배천택, 한진산(韓震山), 유청우(柳靑宇), 서왈보(徐曰甫), 김세준(金世俊), 서동일(徐東日) 등이었다. 다물단의 ‘다물’은 용감, 전진, 쾌단(快斷) 등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입을 다물고 실행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었다.

[역사적 배경]

1920년대 국내의 독립 운동은 직접 일제 침략 기관과 책임자를 공격하는 것과 나라 밖에 건설된 독립군 기지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의열(義烈)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즉 의열 투쟁은 일제의 침략 기관과 책임자를 응징하는 것과 친일 부호(富戶)를 공략해 군자금을 확보하여 국외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지원하는 것이었다. 다물단을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가 군자금 확보에 중요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경과]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공암동은 민족 운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1906년에는 사립 유천 학교를 설립 운영하던 윤대섭(尹大燮)이 도동 학교(道東學校)를 설립하였고, 운문면최성희(崔聖熙)는 1919년 3월 18일 운문면 공암리에서 이용환(李龍煥), 김문근(金文根), 윤병림(尹炳林) 등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1924년 1월 대구 출신 국민당원 서동일은 국민당 이사장 남형우로부터 군자금 모집 특파원이란 신임장과 군자금 모집 취지서, 그리고 남형우의 사진 10여 장을 받아 몰래 숨기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1924년 1월 12일 서동일청도군 운문면 공암동에 사는 예안 군수 출신 윤영섭(尹瑛燮)을 방문하였다. 그는 윤영섭에게 군자금 모집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고 윤영섭의 별장인 거연정(居然亭)에 윤영섭의 제자 윤병채(尹炳采), 윤병일(尹炳馹) 등을 오게 하였다. 서동일은 이들을 국민당원으로 가입시키고, 남형우의 사진을 한 장씩 주었다.

그리고 서동일윤병채의 양가 맏형수인 이여심(李女心)에게서 1,000원을 받았는데, 이는 윤병채가 나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재산이 넉넉한 윤병권(尹炳權), 최홍태(崔洪台), 최홍열(崔洪烈), 박순병(朴淳炳), 김일준(金馹俊) 등에게도 군자금을 내줄 것을 권유했다. 그리하여 윤병권에게 2,000원을 요청해서 100원을, 최홍태, 최홍열 두 사람에게 15원을, 박순병으로부터 35원을, 김일준으로부터 100원을 각각 기증받았다. 그리하여 서동일은 총액 1,400여 원을 가지고 1924년 2월 상순에 북경으로 돌아가서 1,000원을 남형우와 배천택에게 전달하였다.

1925년 1월 서동일은 다시 국내로 파견되었다. 이번에는 특파원 신임장과 함께 많은 금액을 제공한 사람에게 줄 다액 출금자 표장 휘장(表彰徽章) 2장을 지녔다. 그는 1925년 1월 8일 청도군 운문면 윤영섭을 방문하고, 거연정에서 윤병채, 윤병일 등과 다시 군자금을 모금 계획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여심의 집에 식객으로 출입하고 있는 3·1 독립운동 참여자 최성희를 거연정으로 불러 군자금 제공을 권했다. 군자금 제공 증서로 표창 휘장 1개를 주고 최성희윤병채를 통해서 재차 이여심에게 권유하여 현금 30원을 제공받고 북경으로 돌아갔다.

1925년 봄 다물단의 선언서와 특파원 신임장 각 1장씩을 지닌 그는 5월 22일 북경을 출발하여 세 번째로 국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5월 28일 청도를 거쳐 경상북도 경산군 자인면에 도착해 그곳의 자산가 장재수(張在洙), 석제원(石濟元), 김윤근(金潤根) 등을 찾아 다물단 선언서를 보여주고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또 경산군 남산면(南山面) 경동리(慶洞里) 김상규(金相珪)의 차남 김두남(金斗南)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의 여비로 10원을 받은 일도 있었다.

[결과]

1925년 서동일을 비롯하여 대구의 배천택, 이종호(李鍾昊), 청도의 윤영섭, 윤병채, 윤병일, 최성희(崔聖熙) 등이 제령(制令) 위반 혐의로 붙들려 1925년 6월 검찰에 넘겨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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