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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 군자금 모집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66
한자 儒林軍資金募集事件
이칭/별칭 제2차 유림단 의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4년연표보기 - 유림 군자금 모집 사건, 경상북도 청도군 윤병권이 유림단의 군자금 모집에 연루됨
발생|시작 장소 유림 군자금 모집 사건 - 경상북도 청도군
성격 항일 운동
관련 인물/단체 김창숙|윤병권

[정의]

일제 강점기에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서 윤병권이 1924년 유림단의 군자금 모집에 연루된 사건.

[개설]

1920년대 청도 지역에서 발생하였던 독립 운동 관련 사건은 1921년 12월 신민사(新民社) 사건과 1925년 6월 다물단(多勿團) 사건 등이 있다. 그 외에 이정희(李庭禧)[매전면]는 1922년 12월 조선 독립 운동 후원 의용단(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의 군자금 모집 사건, 김인제(金仁濟)[청도읍]는 1922년 길림성 군정서 부속 흥업단(吉林省軍政署附屬興業團)의 군자금 모집 사건, 홍재범(洪在範)[풍각면 동산리]은 1923년 워싱턴 회의 독립 청원 및 대한민국 임시 정부 독립 공채 모집 사건, 윤병권(尹炳權)[운문면 공암리]은 1924년 유림단(儒林團)의 군자금 모집 사건, 김진효(金鎭孝)[운문면 공암리]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사건 등에 연루되었다.

그밖에 청도 출신의 최태욱(崔泰旭)[화양면 합천리]은 1919년 11월 조직된 기미 육영회(己未育英會)의 간사로 활동하였고, 윤치언(尹致彦)[청도읍]은 1920년 9월 진주 청년 친목회(晉州靑年親睦會) 사건에 관련되었다. 그리고 강수영(姜壽永)[이서면 서원리]은 3·1 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 독립단(大韓獨立團), 남만 통일회 후원회(南滿統一會後援會), 통의부(統義府) 등에 참가한 뒤, 1927년 귀국하여 진주, 마산 등지에서 청년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역사적 배경]

1919년 3·1 운동 당시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 운동서를 보낸 유림들은 1925년 김창숙을 중심으로 제2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 운동을 시도했다. 김창숙은 1925년 봄 북경에서 이회영 등과 함께 군사 기지 건설 계획을 논의하였다.

일제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여 독립운동가와 재만(在挽) 동포들을 옮겨 목축과 경작으로 생활 터전을 마련하고, 이를 토대로 무관 학교를 건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일제와 전면적인 독립 투쟁을 전개한다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대상지로는 열하(熱河)와 차하르[察哈爾] 지역, 그리고 내몽고 등지의 황무지였다. 중국 정계의 요인인 참의원 의원 이몽경(李夢庚)과 풍옥상(馮玉祥)의 부하 서겸(徐謙)과 임택풍(林澤豊) 등을 통해 수원(綏遠), 포두(包頭) 등 내몽고 지역의 3만 정보[약 297.522㎢]를 개간하기로 하였다.

[경과]

김창숙은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는 일을 직접 맡고 나섰다. 자금을 모을 대상은 바로 영남 지역 유림이었다. 김창숙은 송영호(宋永祜)[영주], 이봉로(李鳳魯)[달성], 김화식(金華植)[봉화] 등과 구체적인 자금 확보 계획을 세웠다. 즉 자금 모집의 범위를 파리 장서 서명자 130명, 목표 금액 20만 원으로 정하였다.

김창숙은 1925년 6월 말 송영호를 먼저 국내로 침투시키고, 자신도 8월 중순에 서울로 잠입하였다. 서울에 거점을 확보한 그는 관훈동에 마련된 면우 집간소(俛宇集刊所)를 중심으로 정수기(鄭守基), 손후익(孫厚翼) 등 영남 유림들을 만나서 자금 모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10월 중순까지 그 성과를 별로 올리지 못했다.

이에 김창숙은 강제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친일 부호에게 강제로 돈을 받아내는 방법을 생각하고, 이를 담당할 무장 조직 신건 동맹단(新建同盟團)을 조직하였다. 여기에 김창숙, 김화식, 송영호, 곽윤(郭奫), 김황(金榥), 손후익, 하장환(河章煥), 이자근(李字根), 이기병(李基炳) 등이 참석했다. 이 가운데 김화식, 송영호, 정수기 등은 권총을 가지고 여러 곳에서 돈을 모았다.

김창숙의 자금 모집 과정에서 청도 출신의 부호 윤병권(尹炳權)은 200원을 제공하였다. 신건 동맹단의 정수기가 2만 원을 요구하였으나 그렇게 많은 돈을 마련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관련자들이 체포되는 과정에서 윤병권도 체포되어 고생하였다.

[결과]

군자금 모집은 강제성을 띠었지만 모금액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더욱이 대구에서 울산으로 이동하던 김창숙은 1926년 1월에 언양에서 타고 가던 자동차가 구르는 바람에 허리에 절상(絶傷)을 당하고 말았다. 모금액도 적고 중상까지 입게 되자, 1926년 3월 김창숙은 마침내 계획을 중단했다.

1926년 3월 22일 그는 삼랑진을 출발하여 3월 26일 봉천[지금의 심양]에 도착하였다. 김창숙이 떠난 일주일 뒤 4월 2일 김화식이 체포됨으로써 관련자들이 줄줄이 붙잡히기 시작하여 5월 중순까지 대부분 체포되었다. 돈을 많이 거두지는 못했지만, 김창숙이 귀국하여 몰래 활동하던 6개월 동안 그 누구도 밀고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에서 유림의 의리 정신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유림단의 군자금 모집 사건은 1925년 김창숙을 중심으로 전개된 제2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 운동으로 유림들의 집단적 항일 투쟁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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