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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회의 독립 청원 및 독립 공채 모집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65
한자 -會議獨立請願-獨立公債募集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3년연표보기 - 워싱턴 회의 독립 청원 및 대한민국 임시 정부 독립 공채 모집 전개
성격 독립운동|항일 운동
관련 인물/단체 홍재범

[정의]

1923년에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서 홍재범이 워싱턴 회의 독립 청원 및 대한민국 임시 정부 독립 공채 모집에 연루된 사건.

[개설]

1921년 11월 이승만이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 평화 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비롯한 국내외의 독립운동 세력이 후원하였다. 당시 한국 대표단은 한국 문제를 의제에 포함시켜 줄 것을 간청하는 진정서와 임시 정부의 독립 요구서, 그리고 국내 대표들이 이름을 연서한 한국 인민 치태평양 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 등을 접수시켰으나 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도 출신의 홍재범(洪在範)[풍각면 동산리]은 1923년에 워싱턴 회의 독립 청원 및 대한민국 임시 정부 독립 공채 모집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역사적 배경]

3·1 운동 이후 항일 독립운동이 폭발적으로 펼쳐지자, 전국적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일제가 찾아낸 비밀 결사적인 독립운동 단체는 220개가 넘었다. 많은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 운동가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비롯하여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에 대한 지원 활동을 전개하였다.

[경과]

1921년 11월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 평화 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려고 온 힘을 쏟았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 정부홍진(洪震)을 중심으로 태평양 회의 외교 후원회(對太平洋會議外交後援會)와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외교 연구회를 조직하여 후원하였고, 한중 민간단체인 한중 호조사(韓中互助社)나 한중 협회(韓中協會)도 여기에 동참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도 『동아 일보』는 사설에서 한국 문제가 의제로 상정될 것인지 여부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또 일부 청년 학생 중에는 태평양 평화 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논의되든 안 되든, 이를 기회로 삼아 독립운동 열기를 살려 보려고 작정하였다. 이와 같이 워싱턴 회의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회의 개최 날짜가 다가오자 국내에서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에 조선 총독부에서는 천도교 측에 자숙하라는 경고를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는 13도 지역 대표 367명이 연명 날인한 한국 인민 치태평양 회의서를 한국 대표단에게 보내 대표단의 활동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밖에 임시 정부 파견원 이현수(李賢壽)가 워싱턴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경상북도 청도 출신의 홍재범(洪在範)은 대구의 외국인 선교사 사무실에 근무하다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되었다.

[결과]

워싱턴 회의가 개최된 이후 한국 대표단은 한국 문제를 의제에 포함시켜 줄 것을 간청하는 진정서와 임시 정부의 독립 요구서, 그리고 국내 대표들이 이름을 연서한 한국 인민 치태평양 회의서 등을 접수시켰으나 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의가 열린 1921년 11월부터 이듬해인 1922년 2월 초까지 한국 문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이에 한국인들은 실망하였고, 그 동안의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기대와 환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워싱턴 회의에서 독립 청원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외국에 의존하는 외교적인 독립운동은 국제 정세의 변화가 없는 한 무망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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