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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육 구국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55
한자 新敎育救國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8년 3월연표보기 - 사립 유천 학교 설립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5년 6월연표보기 - 사립 개명 학교 설립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6년연표보기 - 사립 도동 학교 설립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6년연표보기 - 사립 의명 학교 설립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6년연표보기 - 사립 유명 학교 설립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6년 12월 29일연표보기 - 사립 신명 학교 설립
발생|시작 시기/일시 구한국 시대 - 사립 온명 학교 설립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7년 11월연표보기 - 사립 문명 학교 설립
성격 교육 운동|계몽 운동
관련 인물/단체 윤대섭|김명옥|진두환|박병현|이정희|김우곤|성두현|이원우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신교육 구국 운동.

[개설]

신교육 구국 운동 은 대한 제국 시기 계몽 운동가 및 계몽 운동 단체의 사립 학교 설립을 위한 신교육 운동에 민중들이 호응하면서 시작되었다. 나아가 민중들의 자발적인 학교 설립 추진으로 신교육 구국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대한 제국 시기 계몽 운동을 전개했던 국민 교육회(國民敎育會)[1904년], 대한 자강회(大韓自强會)[1906년 4월], 대한 협회(大韓協會)[1907년 11월], 그리고 지역 학회 운동의 일환으로 조직된 서북 학회(西北學會), 호남 학회(湖南學會), 기호 학회(畿湖學會), 교남 교육회(嶠南敎育會), 관동 학회(關東學會), 신민회(新民會) 등의 계몽 운동 단체와 이와 연관된 계몽 운동가들은 신교육 구국 운동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 설립된 사립 학교 수는 3,000여 개교에 달하였다.

경상북도의 경우 계몽 운동이 확산되면서 선각적인 개화 인사의 노력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학교 설립이 매우 활발하였다. 그 결과 경상북도에서는 1905년부터 1909년 3월 1일까지 155개교의 사립 학교 인가를 청원했다.

청도 지역의 경우 1898년부터 1910년까지 모두 10개의 신교육 기관이 신교육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

[역사적 배경]

1905년 이후 계몽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경상북도에서도 중앙의 계몽 운동 단체 지방 지회와 더불어 독자적인 계몽 운동 단체가 결성되었다. 청도 지역에는 독자적인 계몽 운동 단체로써 운산 친목회(雲山親睦會)간친 교육회(懇親敎育會)가 선각적인 유림들에 의해 설립되어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한 신교육 구국 운동과 산업 진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 제국 시기 계몽 운동 단체들은 교육 흥학(敎育興學), 민지 계발(民智啓發), 상업 발달(商業發達) 등을 표방하였으며, 그중에서도 교육 흥학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이들은 국권 침탈의 위기 상황 아래서 신교육을 통해 애국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국권 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청도 지역의 계몽 운동 단체들도 마찬가지였다.

1906년 대한 제국의 황제 고종(高宗)의 흥학 조칙(興學詔勅)에 따라 발표된 경북 관찰사 신태휴(申泰休)의 흥학 훈령(興學訓令)은 근대적인 학교 설립을 가속화시켰다. 청도군의 경우 1907년 7월에 모두 9개소의 신교육 기관에 420여 명의 학도가 취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경과]

1898년 3월 경상북도 청도군 대성면[지금의 청도읍] 유호리에 설립된 사립 유천 학교(私立楡川學校)는 경상북도 최초의 신교육 기관이었다. 1899년 7월 설립된 것으로 알려진 대구의 사립 달성 학교(私立達城學校)보다 1년 앞서 설립된 신교육 기관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사립 유천 학교는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 출신의 일진회 청도 지회장 윤대섭(尹大燮)이 설립하였다.

사립 개명 학교(私立開明學校)는 1905년 6월 김명옥(金明玉)이 설립한 소학교로 교사는 일본인 강천애길랑(江川愛吉郞)이었고, 학생은 모두 53명이었다. 일본에 유학했던 김명옥은 귀국하여 일본 헌병 분견소장 및 군수의 후원을 받아 사립 개명 학교를 설립했다.

사립 도동 학교(私立道東學校)는 사립 유천 학교를 설립·운영하던 윤대섭이 1906년 자신의 고향인 운문면 공암리에 설립한 소학교이다.

사립 의명 학교(私立義明學校)는 윤대섭이 운영하던 유천 학교를 계승하여 1906년 하남면 유천리의 유지 진두한(秦斗翰), 김병수(金秉秀), 이규현(李圭鉉) 등이 설립한 소학교로 1910년 경 졸업생 수십 명이 관리나 실업인으로 출세하기도 했다.

사립 유명 학교(私立牖明學校)는 1906년 청도 지역의 유림들이 향교 재정을 활용하여 설립한 소학교였으나, 1909년 사립 청도 보통 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가 1911년 청도 공립 보통 학교로 변경했다.

사립 신명 학교(私立新明學校)는 1906년 12월 29일 박병현(朴秉鉉)이 자신의 종중답 200두락[약 9만 9174∼19만 8347㎡]을 기본 재산으로 설립하였으며, 1917년 3월 사립 선암 학교(私立仙巖學校)로 교명을 변경하였다가 1919년 5월 금천 공립 보통 학교(錦川公立普通學校)로 변경했다.

사립 온명 학교(私立溫明學校)는 구한국 시대 매전면 온막리이정희(李庭禧)가 설립한 사립 학교였으나 1924년 매전 공립 보통 학교(梅田公立普通學校)로 변경되었다.

사립 문명 학교(私立文明學校)는 1907년 11월 운문면 신원리운문면 일원의 선각적인 인사들이 설립하였다. 사립 문명 학교를 설립한 선각적인 인사들은 이미 1905년 이전 신원리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교육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교육을 통해 민지(民智)를 개명(開明) 시킴으로서 근대적인 의식을 일깨우려 하였다. 이러한 선각적인 인사는 성두현(成斗鉉)[교장]과 김우곤(金禹坤) 등의 유림들이었고, 운문면의 보수적인 유생들이 조직한 운산 친목회간친 교육회도 문명 학교에 기부금을 내는 등 신식 교육의 실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사립 덕명 학교(私立德明學校)는 구한국 융희 연간[1907∼1911]에 화양면 송금리(松金里)의 선각적인 유생 이원우(李元雨)가 설립하였다. 이후 폐지되었다가 1920년 성현 학원(省峴學園)으로 다시 개교하였다.

[결과]

구한말 청도 지역에서 신교육 기관의 설립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1908년 8월 일제는 사학 탄압의 방법으로 사립 학교령(私立學校令)을 공포해 학교의 설립 인가를 해주지 않았고, 전국적으로 많은 사립 학교가 운영난으로 문을 닫아야 하는 실정에 이르렀다.

청도군의 경우에도 선각적인 자산가들이 사립 학교의 재정을 부담하는 등 학교의 운영난을 타개하고자 하였지만 더 이상 사립 학교를 설립할 수 없었고, 오히려 관·공립 학교로의 전환이 강요되었다. 1909년 설립된 사립 청도 보통 학교의 경우 1911년 청도 공립 보통 학교로 변경하여 학교 운영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 정치의 일환으로 교육 시설이 확대되면서 초등 교육과 실업 교육이 확장되었다. 여기에 부응하여 청도 지역에서도 도주 학원(道州學院), 성현 학원(省峴學院), 영동 학교(嶺東學校), 내동 의숙(內東義塾), 보성 학원(普成學院), 남양 학원(南陽學院) 등의 농촌 간이 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청도, 금천, 풍각, 매전, 이서 등지에 공립 보통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결과 종래 민족적 색채가 짙은 사립 학교는 식민지 지배 체제 속으로 편입되어 갔다.

1927년 청도군에는 공립 보통 학교 5개교, 사립 보통 학교 1개교, 사립 강습소 8개소, 개량 서당 41개소, 재래 서당 40개소가 있었다. 1927년 4월 각 면에서 김명옥(金明玉), 이승록(李承祿), 이정기(李井基), 박수태(朴秀台), 이잠호(李岑浩), 박재강(朴在康), 이정태(李庭泰), 김진복(金鎭馥), 박순영(朴淳永), 박상현(朴祥鉉) 등이 청도 학교(淸道學校) 평의원(評議員)으로 선출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한 제국 시기 청도 지역의 계몽 운동은 비교적 활발하였고, 신교육 구국 운동은 교육 흥학을 최우선으로 삼고 애국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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