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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45
한자 三一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6일 - 화양읍에서 만세 시위를 모의하다 예비 검속됨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1일 - 매전면 장연리 만세 시위 운동 전개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4일 - 유천 시장 장날 만세 운동을 계획했으나 주동자 검거됨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운문면 만세 운동 전개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운문면 신원리 일경구타 의거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31일 - 대성면(지금의 청도읍) 거연리 만세 운동 전개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5월 7일 - 매전면 구촌리 만세운동 전개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발생
성격 독립운동|항일 운동
관련 인물/단체 문주상|김보곤|김상구|김종태|서정기|조경윤|손기현|김진효|이승덕|이일갑|이내윤

[정의]

1919년 3월 1일을 기해 경상북도 청도군을 포함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 독립 만세 운동.

[개설]

3·1 운동 당시 청도군에서는 3월 중순부터 5월 초순에 걸쳐 모두 7회의 크고 작은 만세 시위운동이 발생하였다. 특히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들은 관공서 습격, 일본 경찰 구타, 일본인과의 충돌, 자위회 공격 등 점차 격렬한 무력시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미국 대통령 윌슨이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이른바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표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외교·독립운동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특히 무단 통치에 대한 저항감, 또는 고종 독살설로 말미암은 분노감 때문에 많은 민중들이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청도 지역에서는 일찍이 근대적 민족의식을 갖춘 청년 지식인들이 독자적으로 만세 시위를 계획하거나 주도하였고, 나아가 농민 및 노동자 계층이 참여함으로써 대중적인 시위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경과]

청도 지역은 경부선 철도 연변에 위치한 지방 도시였으므로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운동의 소식이 비교적 빨리 전달되었고 그로 인해 만세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1919년 3월 6일 화양읍에서 문주상(文周祥) 등이 만세 시위를 모의하던 중 예비 검속되었고, 3월 11일 및 12일 매전면 장연리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청도군의 만세 시위는 서울을 비롯하여 서북 지방에서 전개되고 있던 만세 시위를 직접 목격하고 귀향한 인사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대성면(大城面)[지금의 청도읍] 유호리(楡湖里)의 만세 운동은 장로교회 조사 김보곤(金寶坤)이 주도하였는데, 그는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3월 2일 평양으로 가던 중 평양과 서울에서 전개되고 있던 만세 운동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운문면의 만세 운동은 문명 학교(文明學校) 졸업생 김상구(金相久)김종태(金鍾台)광무 황제의 인산(因山)에 참례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와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1일 매전면 장연리에서는 김집이(金集伊) 등 7명이 ‘독립 만세’를 고창(高唱)하였고, 다음날 3월 12일에도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13일 김보곤서정기(徐正基), 조경윤(趙景潤) 등과 3월 14일 유천 시장(楡川市場) 장날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일제 경찰의 경계가 엄중하여 만세를 부르지 못하고, 김보곤 등의 주동자 모두가 검거되었다.

1919년 3월 18일 운문면의 만세 시위운동은 문명 학교 졸업생들이 주도하였다. 서울에서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온 김상구김종태는 3월 10일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고, 3월 15일 밤 손기현(孫琪鉉) 등은 독립운동을 환기하기 위한 격문을 작성하여 운문면 각 마을에 부착하였다. 3월 17일 밤 손기현김진효(金鎭孝) 등이 문명 학교에 모여 만세 시위운동을 촉구하였다. 3월 18일 김진효 등은 3월 15일 밤 각처에 첨부한 격문 사건으로 운문 주재소에서 조사받고 돌아오던 중, 만세 시위를 단행키로 하고 운문면사무소로 들어가 ‘대한 독립 만세(大韓獨立萬歲)’를 적은 기(旗)를 만들었다. 김진효의 개회와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한 뒤, 각 동리를 누비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으며, 이날 밤 운문면 공암리(孔岩里)의 강정(江亭)에서도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19일 청도 경찰서 순사대가 전날의 만세 시위의 주동 인물인 김종태, 김상구 외 6명을 체포하기 위해 왔다가 운문면 신원리에서 동민들로부터 곤봉으로 구타를 당했다.

1919년 3월 31일 대성면 거연리의 단산 서당(丹山書堂) 학생 이승덕(李承德)은 태극기를 만들어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후 경부선 철로 가에 세워 사람들을 선동하였고, 4월 20일에도 이승덕은 단산 서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철로 가에 세웠다.

1919년 5월 7일 매전면 구촌리에서는 일제가 자위회(自衛會)를 조직하여 동민들의 날인을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밀양군 상동면 매화리의 이일갑(李一甲) 외 16명은 5월 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리로 들어와 만세 시위를 전개하고, 자위회 가입의 날인을 저지하려다가 이일갑이 부상을 당했다. 이에 이일갑의 부친 이내윤(李乃潤) 등 동민 200여 명이 곤봉을 들고 응원을 오자 날인을 받고 있던 자들은 달아났다. 매화리와 구촌리의 동민들은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과]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들은 관공서 습격, 일본 경찰 구타, 일본인과의 충돌, 자위회 공격 등 일제와 충돌하였다.

청도군에서 전개된 만세 운동은 통일적인 지도 세력 없이 각 지역에서 고립 분산적으로 일어났다. 그렇지만 각 지역의 만세 운동은 가능한 수준에서 시위 주도자의 조직적인 준비와 이에 동조한 참가자들의 적극적인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청도군 만세 시위의 주동자들은 학교의 교사, 청년 지식인, 학생, 교회 조사 등 지역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던 사람들이었다. 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한 인물들은 20∼30대의 농민, 수공업자, 고용인, 하급 관공리 등의 청장년층과 구한말(舊韓末) 교육 구국 운동의 혜택으로 신교육을 받은 청년 지식인이었다. 이들은 학연, 지연, 혈연을 바탕으로 시위 주도 세력을 형성하여 대중적인 시위를 펼쳤다.

[의의와 평가]

청도군의 3·1 운동은 근대적 민족의식을 갖춘 청년 지식인들이 독자적으로 만세 시위를 계획하거나 주도하였고, 나아가 농민 및 노동자 계층이 참여함으로써 대중적인 시위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세 시위에 이어 무력 투쟁이나 만세 시위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주변 지역과의 제휴는 매우 주목된다.

청도군 3·1 운동은 1920년대 이후 전개된 청도 지역의 청년 운동, 소년 운동, 소비조합 운동, 형평 운동 등의 사회 운동을 대중적인 민족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10년대 신교육을 통해 성장하였던 청년 지식인이 1920년대 민족 운동에 있어서 주도적인 위치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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