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398
한자 古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고대/고대
집필자 이형우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 경상북도 청도군 지역의 역사.

[개설]

청도 지역은 삼한 시대 이서국(伊西國)이 초기 성읍 국가를 형성하였으나, 3세기 말엽 인근의 다른 소국과 함께 신라로 편입되었다.

[변천]

현재 청도군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용각산맥에 의하여 동·서 두 지역으로 크게 구분된다. 양 지역의 면적은 비슷하나, 청도군의 동부는 8할이 산지인 반면, 서부 지역은 분지로 청도천(淸道川) 유역의 평지와 구릉이 대부분 경작지로 농경지의 면적이 동부 지역의 20배가 넘는다.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과 운문산(雲門山)에서 시작되는 동창천(東倉川)이 서부 지역의 청도천과 합류하여 밀양강을 이루는 곳이 유천(楡川)이다. 이곳은 현재도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이며, 서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경상남도 창녕군, 동쪽으로 경주시를 연결하는 교통상의 중요한 지점이다.

이러한 청도 지역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한반도의 남부 지역에 기원전 20세기경 대륙의 금속 문화가 전래되면서 사회적 변화가 급속히 전개되었다. 청도군의 유적 분포를 통해서 청도천 유역의 화양읍이서면, 동창천 유역의 매전면 등 세 지역에 일찍부터 취락을 형성하였으며,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이서국(伊西國)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사로국은 혁거세가 진한(辰韓)의 군장이 되면서 맹주국으로 등장하였다. 진한 소국들 사이에는 1세기 중엽 이전까지는 대체로 군사적인 정복, 피정복의 관계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탈해왕(脫解王) 이후부터 대외 투쟁 및 진출이 두드러지며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말까지 인근의 소국들을 병합시키고 3세기 말엽에는 가야 지역을 제외한 경북의 전 지역을 장악하는 신라 왕국으로 성장하였고, 청도 지역의 이서국도 신라로 흡수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이서국조에는 신라의 선덕 여왕 즉위년인 632년에 이서군 금오촌의 영미사에서 운문사에 납전을 하였는데, 금오촌은 지금의 청도군이며 청도군은 고이서군이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서국이 멸망하고 그 지역은 선덕 여왕 대에 이르기까지는 이서군으로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성군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 대성군조에 “구도성(仇刀城) 경내 솔이산성[率伊山縣, 率已山縣], 가산현(笳山縣[城]), 오도산성(烏刀山城) 등 3성이 청도군에 합속되었다.”라고 하며, 밀성군조에는 “오구산현(烏邱山縣), 경산현(驚山縣), 솔이산현(率伊山縣) 등 3성이 청도군에 합속되었다.”라고 하여 청도의 행정 구역에 혼란이 있다. 이로 인해 청도의 위치 비정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으나, 이서국의 세력으로 전해지고 있는 솔이산성[소산현(蘇山縣)]은 매전면 일대, 가산현[경산성(驚山城), 형산성(荊山城)]은 화양읍 소라동에 비정된다. 오도산성(烏刀山城)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데 유천 북쪽의 오리산(烏里山)[오혜산(烏惠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757년(경덕왕 16)에 지명 개정에 따라 솔이산을 소산현(蘇山縣)[매전면 동산리), 가산을 형산현(荊山縣)[화양읍 소라리 이서산성), 오도산은 오악현(烏岳縣)[유천 오례산성]으로 개명되고 양주(良州)[양산]에 속하기도 했으나, 군속은 밀성군에 속하여 있었다.

청도군이라는 명칭은 『고려사 지리지(高麗史地理誌)』 밀성군 속현 청도군조에 고려 초에 신라의 대성군과 오악, 형산, 소산 등 세 현이 합해지면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이서국의 중 심세력 집단이라 할 수 있는 3성은 밀성군에 편입되었다가 고려 초에 청도군으로 개칭된 것으로 보인다.

[유적 현황]

청도군의 고대의 유적으로는 폐성, 백곡산성, 오례산성 등이 있다. 폐성(吠城)청도읍화양읍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주구산 절벽 위에 축조된 산성으로 이서산성(伊西山城), 주구산성이라고도 불린다. 산성의 축조 연대는 정확치 않으나, 이서국 때 교통의 요충지이며, 전초 기지의 역할을 위해 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려 왕건이 신라의 잔병이 이 성에서 저항할 때, 개의 형상을 닮은 지형을 이용한 계략을 생각해 낸 보양 국사(寶讓國師)의 도움으로 이들을 토벌하였다고 전하는데, 이로부터 산 이름을 주구산, 산성을 폐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성내에 토기 조각, 기와 조각 등이 채집되고 있어 이곳에 삼국 시대의 고분이나 주거지 등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백곡산성(栢谷山城)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산23-14 일대이다. 토평리 백곡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성으로 옛 이서국의 왕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청도천변으로 펼쳐진 넓은 들판 사이에 해발 100∼120m의 구릉이 있고, 이 구릉 남단 오목한 곳에 백곡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토성으로 현재 경지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오례산성(烏禮山城)청도군 매전면 구촌리 산272 일대와 지전리 산212 일대, 청도읍 거연리 산207 일대를 아우른다. 오례산성청도읍에서 남동쪽으로 6㎞ 가량 떨어진 해발 500∼626m의 능선 상에 있다. 석성으로 일명 오혜산성(烏惠山城), 오례산성(鰲禮山城), 구도산성(仇刀山城) 등으로 불렀다. 성의 크기는 대략 남북 1.0㎞, 동서 1.0㎞이며, 사방의 가파른 능선 또는 암벽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성벽으로 오르기는 매우 어렵지만 내부는 매우 평탄한 지형을 이루는 천혜의 요새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지형지세에 따라 내탁 기법에 의한 편축법이 사용되었으며, 일부 협축법도 사용되었다. 체성은 주변의 할석을 이용해 내경되게 성 밖을 대략 1.0∼2.8m 정도로 쌓아 올리고, 능선 사면 상에는 성벽 윗면을 계단식으로 축조한 것이 확인된다. 성벽 위에는 성첩을 두었는데 상단 폭은 대략 50∼90㎝ 정도이며, 체성 외벽을 그대로 연장하여 축조하였다. 성문은 사방 성벽 중 접근이 용이한 낮은 능선 사면에 문지가 확인되며, 서문지에는 약 3m 거리를 두고 문지 도리석 2매가 남아 있다. 문지 근처나 능선 봉우리에 망대 또는 망루와 같은 시설을 두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