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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399
한자 伊西國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이형우

[정의]

고대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 있었던 초기 성읍 국가.

[개설]

이서국(伊西國)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斯盧國)과 음집벌국(音汁伐國), 실직국(悉直國), 압독국(押督國), 조문국(召文國), 감문국(甘文國), 사벌국(沙伐國), 우시산국(于尸山國), 거칠산국(居漆山國) 등과 함께 삼한 시기에 경상도 지역에 존재하였던 소국(小國)이다. 현전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기록인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통해서 그 위치와 멸망 등을 알 수 있다.

사로국의 인접 지역에 위치하였던 압독국이 음집벌국, 실직국과 함께 2세기 초엽 사로국에 병합되어 간접 지배를 받은 것처럼 인접한 이서국도 비슷한 시기에 병합되었다.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를 보면 “유례 이사금(儒禮尼師今) 14년인 297년에 금성을 공격하자 신라는 크게 군사를 모아 적을 막았으나 이들을 격파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수를 알 수 없는 군사들이 머리에 대나무 잎을 꽂고 나타나 아군과 함께 적을 격파시켰으며 그들의 자취는 보이지 않고 다만 많은 대나무 잎이 죽장릉(竹長陵)[竹現陵, 미추왕릉]에 쌓여 있었고 나라 사람들은 선왕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치게 되었다고 여기게 되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압독국의 모반처럼 이서국의 토착 집단도 강성한 잔존 세력을 중심으로 금성(金城)을 크게 공격하여 사로국을 위협하기도 하였다고 하겠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사로국은 2세기 초부터 부근의 소국들을 복속시키고 3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가야 지역을 제외한 경상북도의 전 지역을 장악하면서 신라 왕국으로 성장하였는데, 이서국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하여 완전히 멸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명칭 유래]

이서국의 중심지는 『읍지(邑誌)』 등에 전하는 ‘군의 북쪽 화양읍 토평동의 와촌, 둔직에서 유등동의 짐터로 이어지는 반월형의 구릉 일대’로 짐작된다. 구릉 위에는 백곡 토성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으며, 그 남쪽은 이서면까지 청도천 유역 최대의 넓은 들판이 형성되어 있다. 둔직, 근방위의 마을 이름도 이서국 왕성을 지키던 군대가 주둔하였던 곳에서 비롯되었다.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신라가 금관 가야와 대가야를 병합하기 위하여 기울인 노력과 그 과정을 소개한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에 이궁대(離宮臺), 정전사(停戰寺), 정남정(定南亭), 파서막(破西幕) 등의 기록과 마전암(馬轉巖), 어정(御井), 오산(鼇山), 풍류현(風流峴), 왕당(王堂), 왕정자(王亭子) 등 많은 신라 왕들의 유행소(遊幸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보면 당시 신라의 낙동강 방면 가야 지역으로의 진출은 이서국의 고지(故地)였던 청도를 전초지로 하여 이루어졌다. 또 청도 지역이 육장굴(六將窟), 마전현(馬轉峴), 마곡(馬谷), 창리(倉里), 비지리(飛只里) 등 장수, 기마군의 이동 등 전투에 얽힌 설화의 내용을 전하는 많은 지명으로 미루어 사로국과 이서국의 교전 당시 및 이서국의 병합 후에도 신라의 서남방 진출의 중요한 통로로 이용되었으며, 신라 통일 후에도 밀양 방면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삼국유사』이서국조에는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 즉 신라의 선덕여왕 즉위년인 632년에 이서군 금오촌(今郚村)의 영미사(零味寺)에서 운문사(雲門寺)에 납전(納田)을 하였는데, 금오촌은 지금의 청도군지(淸道郡地)이며 청도군은 고이서군(古伊西郡)이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이서국이 멸망한 지역에 선덕 여왕 대에 이르기까지는 이서군으로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도군의 명칭은 『고려사 지리지(高麗史地理誌)』 밀성군(密城郡) 속현 청도군 조에 고려 초에 신라의 대성군(大城郡)과 오악(五岳), 형산(荊山), 소산(蘇山) 등 3현이 합해져 형성되었으며, 밀성군의 속읍으로 삼았다가 1109년(예종 4)에 감무(監務)를 파견하였다고 한다.

한편 대성군은 『삼국사기』 지리지 대성군 조에는 “구도성(仇刀城) 경내 솔이산성[率伊山縣, 率已山縣], 가산현(笳山縣[城]), 오도산성(烏刀山城) 등 3성이 청도군에 합속되었다.”라고 하며, 동 지리지 밀성군 조에는 “오구산현(烏邱[禮]山縣), 경산현(驚山縣), 솔이산현(率伊山縣) 등 3성이 청도군에 합속되었다.”라고 하여 혼란이 있다. 이러한 『삼국사기』 지리지의 혼란으로, 그 후 『고려사 지리지』, 『경상도 지리지(慶尙道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등에서 한결같이 이서국→이서군→대성군→청도군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대성군을 지금의 청도 지역으로의 비정은 분명하지 않으며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청도군의 지형적 특성과 유적의 분포를 보면 청도천(淸道川) 유역의 화양읍이서면, 동창천(東倉川) 유역의 매전면 등 세 지역이 일찍부터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을 보인다. 따라서 이서국의 세력으로 전해지고 있는 솔이산성[蘇山縣]은 매전면 일대, 가산현[驚山城, 荊山城]은 화양읍 소라동에 비정된다. 오도산성(烏刀山城)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데 유천 북쪽의 오리산(烏里山)을 지칭한다. 이곳은 동창천청도천이 합류하며 서쪽으로 창녕과 고령, 남쪽으로 밀양을 거쳐 김해로 진출하는 요충지이다. 오리산은 신라 초기 시조 사당에 올리는 제사보다 더욱 중요시하였던 대사(大祀)를 지냈던 삼산(三山), 즉 내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 중 혈례산에 해당된다. 도읍지인 경주의 낭산(狼山)과 더불어 영천, 청도의 삼산은 『삼국유사』의 김유신 조에 전하는 바와 같이 삼산의 여신이 고구려 첩자에 유인되어 가는 김유신을 구하는 등 사로국 당시부터 신라 호국의 성스러운 장소로 여겼던 곳이라 하겠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유례 이사금 14년 조에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오므로 우리는 크게 군사를 들어 막아도 능히 물리치지 못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오는데 그 수효는 이루 셀 수 없었으며 그들은 모두 귀에 댓잎을 꽂고 아군과 함께 적을 쳐 깨뜨렸다. 그 후 그들의 간 곳을 알지 못하더니, 누가 죽장릉(竹長陵)에서 대나무 잎 수만 개가 쌓여 있음을 보았다 한다. 이로 말미암아 국인(國人)들은 말하기를, 선왕(先王)이 음병(陰兵)으로써 싸움을 도와 준 것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삼국사기』 권 제32 잡지 1 제사 조에 “삼산오악(三山五岳) 이하 명산대천을 나누어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한다. 삼산 1은 내력(奈歷) 습비부(習比部), 2는 골화(骨火) 절야화부(切也火部), 3은 혈례(穴禮) 대성군(大城郡)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이서국 조에는 “노례왕 14년(弩禮王十四年)에 이서국인(伊西國人)이 와서 금성(金城)을 쳤다. 운문사 고전(雲門寺古傳)의 제사 납전기(諸寺納田記)를 보면 정관 6년 임진(貞觀六年壬辰)에 이서군(伊西郡)의 금오촌(今郚村) 영미사(零味寺)가 밭을 바쳤다고 하였으니 금오촌은 지금 청도(淸道) 땅이며 청도는 즉, 고이서군(古伊西郡)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제삼 노례왕 조에 “건호[무](建虎[武]) 18년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滅)하였고”라고 기록되었으며,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미추왕 죽엽군 조에는 “이서국(伊西國) 사람이 와서 금성(金城)을 치며, 이편에서도 대거(大擧)하여 막았으나 오래 지탱하기 어려웠다.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와서 돕는데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아군(我軍)과 힘을 합쳐 적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군사가 물러간 후에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댓잎이 미추왕릉(未鄒王陵) 앞에 쌓여 있음을 보고 비로소 선왕(先王)의 음조(陰助)의 공(功)인줄 알고 인하여 죽현릉(竹現陵)이라고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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