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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395
한자 靑銅器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김구군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지역에서 민무늬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던 시대의 사회와 문화.

[개설]

청도군 지역에서 확인된 청동기 시대 유적은 산동 지역의 동창천과 산서 지역의 청도천을 중심으로 그 지류를 따라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과 무덤·의례 유적 등 70여개소가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63개소는 고인돌 무덤[支石墓]이다. 집자리 등 유구나 유물의 대부분은 땅속에 묻혀 있어 발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 수가 적다. 그러나 생활 유적과 무덤 유적은 항상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므로 고인돌 무덤의 주변에는 당연히 마을 유적과 농사를 짓던 경작 유구 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현재까지 청도 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유적의 대부분은 청동기 시대의 것이 많으며 그만큼 당시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기초적인 자료가 집적될 수 있었다. 학술 발굴된 사촌리 선사 유적을 빼면 모두가 구제 발굴로 이루어졌는데 운문댐 수몰 지구에서 3개소, 중앙 고속 도로[대구∼부산 간 고속 도로] 구간 3개소, 청도∼남천 간 국도 25호선 구간 2개소, 청도 풍각∼화양 간 국도 건설 구간 4개소, 풍각 초등학교의 다목적 교실[강당] 건립과 송서 2리 도시 계획 도로 구간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이 밖에 주민 신고에 의한 개별 유구로 화리신당리에서 돌널무덤이 수습 조사되었다.

유적의 입지는 대체로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생활 터전을 선택했기 때문에 각 지류가 만나는 비교적 넓은 충적지상에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마을 유적]

청도 지역의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은 주 하천인 산동의 동창천과 산서의 청도천을 따라 형성된 선상지와 그 지류의 지류가 만나는 비교적 넓은 충적 대지에 주로 분포한다. 발굴 조사된 유적으로는 풍각면 송서리 유적, 각남면 신당리·화리 유적, 화양읍 서상리·진라리 유적, 청도읍 송읍리·유호리·사촌리 유적, 운문면 오진리·순지리 유적이 있다. 지표 조사를 통해 알려진 곳은 청도읍 내호리, 각남면 예리, 화양읍 유등리 닭이목 민무늬 토기[無文土器] 산포지가 있으며 입지는 모두 구릉상이다. 이밖에 고인돌이 조성된 주변은 전부 마을 유적이 있었음을 의미하므로 청도의 청동기 시대 마을들을 그려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집자리는 대개 반지하식의 움집으로 평면 형태가 장방형·세장방형·말각방형·원형 등 다양하며 내부에는 기둥 자리와 화덕 자리, 저장 구덩이 등이 남아 있어 집의 구조와 주거 생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른 시기의 주거지는 신당리 유적에서 2동이 확인되었다. 전기에는 대체로 위석식 또는 무시설의 화덕 자리를 갖춘 장방형과 세장방형의 움집이 유행했는데, 세장방형의 유적은 신당리·화리·진라리·송읍리·순지리 유적에서 총 31동이 확인되었다. 장방형 주거지는 송서리·신당리·화리·진라리·송읍리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중기 이후의 방형 및 말각방형 주거지 94동과 원형 주거지 40동은 신당리·화리·진라리·송읍리 유적에서 드러났다. 이 시기의 집자리는 대체로 중앙 구덩이를 중심으로 양쪽에 2개의 기둥 구멍을 가진 구조적 특징을 보인다.

이 밖에 주거지로 보기에는 다소 규모가 작아서 수혈 유구로 분류한 많은 움 구덩이가 나왔는데, 일부는 주거 공간으로 충분히 활용 가능한 것들이어서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이로 보면 후대로 내려오면서 주거 공간의 면적이 점차 줄어든 대신에 그 수는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인구의 증가와 다세대 공동체에서 세대 공동체로 사회가 분화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전기에 해당하는 장방형·세장방형 움집의 내부에는 대체로 불을 지핀 화덕 자리가 남아 있지만, 방형을 제외한 중기 이후의 말각방형·원형 움집에서는 아예 화덕 자리를 찾아볼 수 없어 중기라는 단순한 시기 차이로 보기 보다는 계절용 또는 특수 용도의 주거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밖에 곡식 저장 등을 위해 만들었다고 추정되는 고상식 건물지(高床式建物址), 연장이나 도구 등을 만들던 공방지[作業場], 토기를 굽던 소성 유구(燒成遺構), 그리고 한데 불 땐 자리[野外爐址] 등이 함께 확인되고 있다.

[무덤 유적]

청도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청동기 시대 무덤은 고인돌 무덤과 돌널무덤[石棺墓]이 주류를 이루지만, 이보다 이른 시기에는 움무덤이 쓰인 것으로 최근 조사에서 드러났다. 움무덤은 신당리 유적에서 1기가 확인되었다. 껴묻거리로 이단병식 석검, 돌화살촉, 네모난 반달칼[長方形石刀], 가지무늬 토기, 민무늬 토기가 나왔다. 고인돌과 돌널무덤은 대체로 같은 무덤 구역 안에서 발견되며 껴묻거리의 구성이나 형식까지도 같기 때문에 크게는 동시기에 조성된 무덤으로 볼 수 있으며, 그룹별로 시차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청도 지역에서 알려진 고인돌 무덤은 63개소를 넘으며 상석만 하더라도 400여 기에 달해 영남 지역의 고인돌 최대 밀집지로 주목받고 있다. 발굴된 유적은 신당리·화리·진라리·송읍리·대천리 고인돌 무덤 떼[支石墓群]가 있다.

[의례 유적]

청동기 시대의 의례 유적으로는 비파 모양 동검[琵琶形銅劍]이 나온 예전리 유적이 있다. 용밭골의 유물 출토지는 산 경사면의 자연석무지를 이용해서 구축한 제사 유적 내지는 매납 유적일 가능성이 크다.

이 밖에 순지리 순늪 마을 북쪽의 언덕 위에 세워져 있던 선돌[立石]이 있는데, 일제 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마을 주민들이 동제(洞祭)를 지냈다고 한다. 주변에 민무늬 토기를 내는 움집 터와 고인돌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같은 시대의 거석 기념물(巨石記念物) 또는 신앙의 대상물로 여겨진다.

[민무늬 토기]

지금까지 청도 지역에서 민무늬 토기가 출토된 곳으로는 산동 지방의 운문면 오진리·순지리 유적, 산서 지방의 풍각면 송서리 유적, 각남면 신당리·예리·화리 유적, 화양읍 진라리·서상리 유적, 청도읍 송읍리·유호리·내호리·사촌리 유적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예리 유적과 내호리 유적만 지표 조사를 통해 알려진 유적이고 나머지는 모두 부분적이나마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를 종합해 보면, 여느 지역 못지않게 청동기 시대 전 기간에 걸쳐 주민들이 정주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석기]

석기는 크게 무기류, 농공구류, 조리 용구와 석기 제작 도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무기류에는 간 돌검과 돌화살촉이 기본을 이루지만 곤봉두의 일종으로 중앙에 자루를 끼울 수 있는 구멍이 뚫렸고 동그란 가장자리를 따라 날을 세운 환상 석부(環狀石斧)와 별 도끼[多頭石斧]가 있다. 이밖에 송읍리 유적에서는 석창이 수습되었다.

간 돌검은 집자리와 무덤에서 모두 나오지만 후자의 것들이 형식상 늦다. 전기 후반의 움집 터에서 나온 것들은 검신이 전부 삼각형에 가깝고 능각이 서지 않은 단면 타원형의 것이 대부분이며 이단병식 석검이 많고 자루에 성혈이 새겨진 것도 보인다. 이단병식 석검은 세장방형과 장방형 움집터에서 주로 나오는데 진라리[4점], 신당리[2점], 송읍리[2점]·화리·순지리 B지구에서 각 1점씩 나왔고, 껴묻거리로 나온 것은 신당리 움무덤의 것이 유일하다.

돌화살촉의 경우 전기에는 나래 달린 삼각 모양 납작촉과 납작 뿌리 이단경촉, 납작 뿌리 일단경촉이 나온다. 이 시기의 특징으로 납작촉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촉신 단면이 마름모꼴이면서 그 하부를 편평하게 갈아내었으며 슴베는 1㎝ 내외로 짧다. 중기 이후는 전반 무렵까지 앞 시기 전통이 존속하지만 점차 단면 육각형의 뾰족 뿌리 촉으로 일변한다. 세장방형과 장방형주거지에서는 납작 뿌리 세장촉[扁平莖細長鏃], 나래 달린 삼각 모양 납작촉[三角灣入扁平鏃], 피홈[血溝]을 낸 납작뿌리 세장촉이 나오고, 말각방형 주거지에서는 납작 뿌리 총알 모양 촉[扁平莖彈頭形鏃], 원형 주거지에서는 석창 모양의 슴베가 없는 촉[石槍形無莖鏃]이 나왔다. 무덤의 껴묻거리로 나온 것을 보면, 신당리 움무덤에서 나래달린 삼각 모양 납작촉과 납작 뿌리 이단경촉, 납작 뿌리 촉, 납작 뿌리 세장촉, 진라리 4호 돌널무덤에서 짧은 납작 뿌리 세장촉, 진라리 3호 돌널무덤에서 납작 뿌리 촉 3점과 뾰족 뿌리 세장촉 7점이 함께 나왔다. 환상 석부는 신당리·송읍리·진라리에서, 별도끼는 신당리에서 출토된 것이 있다.

생활 유물 가운데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돌도끼 종류이다. 돌도끼는 날 모양과 전체적인 형태에 따라 기능이 각각 다른데 나무를 찍어 자르고 쪼개는 것은 양날을 가진 조갯날 도끼가, 목재 가공구로 크게 깎아 내는 용도로 쓰이는 것은 외날을 가진 자귀류로 주상편인 석부와 홈자귀가 있다. 이들과 달리 몸통이 판상으로 된 외날 도끼로 면을 고르는 데 사용하는 자귀날과 대팻날이 있다. 그리고 홈을 파는 데 이용되는 돌끌도 보인다. 이 가운데 중기 이후에 나타나는 홈자귀는 진라리사촌리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돌도끼류는 앞서 본 주된 기능 외에도 때에 따라서는 농경구 등 다목적 용도로 변용하여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농사 도구로 이삭을 따는 반달칼의 경우 긴 네모꼴 돌칼[長方形石刀]은 세장방형 주거지에서, 빗 모양 돌칼[櫛形石刀]은 말각 장방형 주거지와 진라리 고인돌 1∼3호 묘역 시설 내에서 출토했다. 그리고 진라리 세장방형 주거지 86호에서 배 모양 돌칼[舟形石刀]을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박편 석기(剝片石器) 1점이 있다.

조리 용구로는 곡식을 갈거나 찧고 빻는데 이용한 갈돌과 갈판, 공이 등이 있다. 이밖에 토기 제작 시 밑받침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판 모양 석기와 용도가 불분명한 부리 모양 석기, 그리고 석기를 만들 때 받쳤던 모룻돌과 석기 제작을 위한 몸돌 및 석재, 깨어져 나온 조각 등이 많이 나왔다. 이와 더불어 모든 유적에서 많은 숫돌이 나오고 있다.

[옥기]

장신구로 대롱구슬[管玉]은 송읍리에서 2점, 진라리·신당리에서 각 1점씩 나왔고 꾸밈구슬[飾玉]은 진라리에서 2점, 작고 둥근 구슬[小環玉]은 송읍리에서 1점 나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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