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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393
한자 歷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집필자 이형우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의 선사 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선사]

이 지역에 대한 학술적 지표 조사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기원전 취락 집단의 존재, 정치적 지배자의 출현 및 사회 체제를 입증시켜 주는 고인돌의 분포를 보면 유천에서 서쪽 청도천 상류인 풍각 지역까지 약 80여 기가 산재하고 있으며, 동창천 유역에는 매전면에서만 몇 기만 발견되었다.

그러나 영천, 대구, 경주 등 주변 지역에서는 청동 유물이 비교적 풍부하게 출토되었으나 이 지역에서는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출토 유물의 수가 비교적 열세하여 자세한 사회상을 유추할 수 없다. 그러나 운문면, 화양읍, 이서면, 각남면, 풍각면, 매전면 등지에 산재한 고분을 통해서 고인돌 축조 집단을 계승한 정치 집단의 존재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청도군의 지형적 특성과 유적의 분포를 통해서 청도천 유역의 화양읍이서면, 동창천 유역의 매전면 등 세 지역이 일찍부터 취락을 형성하였으며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였다고 하겠다.

[고대]

『삼국사기』 지리지 대성군 조에는 “구도성(仇刀城) 경내 솔이산성[率伊山縣, 率已山縣], 가산현(笳山縣[城]), 오도산성(烏刀山城) 등 3성이 청도군에 합속되었다.”라고 하며, 동 지리지 밀성군 조에는 “오구산현(烏邱山縣), 경산현(驚山縣), 솔이산현(率伊山縣) 등 3성이 청도군에 합속되었다.”라고 하여 기록의 혼란이 있다. 명확한 행정 구역 상의 청도 고지명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어 왔으나 이서국(伊西國)의 중심 세력으로 전해지고 있는 솔이산성[蘇山縣]은 매전면 일대로, 가산현[경산성(驚山城), 형산성(荊山城)]은 폐성(吠城), 견성(犬城)이라 전해지고 있는 화양읍 소라리로 보인다. 다만 오도산성은 문헌마다 명칭이 다르게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의 유천(楡川) 북쪽 해발 약 500m 지점의 오리산성(烏里山城)[오혜산성(烏惠山城)]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사로국의 인접 지역에 위치하였던 압독국이 음집벌국, 실직국과 함께 2세기 초엽 사로국에 병합되어 간접 지배를 받은 것처럼 인접한 이서국도 비슷한 시기에 병합되었으나 압독국의 모반처럼 이서국의 토착 집단도 강성한 잔존 세력을 중심으로 금성(金城)을 크게 공격하여 사로국을 위협하기도 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사로국이 3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가야 지역을 제외한 경북의 전 지역을 장악하면서 신라 왕국으로 성장하였는데 이후 이서국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하여 완전히 멸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도는 757년(경덕왕 16)에는 지명 개정에 따라 솔이산은 소산현(蘇山縣)[매전면 동산], 가산은 형산현(荊山縣)[화양읍 소라리 이서산성], 오도산은 오악현(烏岳縣)[유천 오례산성]으로 개명되고 양주(良州)[양산]에 속하기도 했으나, 군속은 밀성군에 일시적으로 속하여 있었다.

[고려 시대]

신라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온 청도군은 고려로 접어들며 940년(태조 23)에 처음으로 청도현(淸道縣)이라 하였다. 이후 983년(성종 2)에 12목제를 실시하면서 경주목에 속하였다가 이후 10도제를 실시하면서 영동도에 속하게 되었다. 1010년(현종 1)에 도주(道州)로 주치(州治)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이후 1012년 지방 행정 개편을 개정하면서 경주 도호부(慶州都護府) 관할 도주(道州)가 되었다가 1018년 밀양군(密陽郡) 관할의 청도현, 풍각현으로 분리 격하되었다. 그러다가 고려 말인 1343년에는 다시 청도군이 되었다가 현으로 격하되는 과정을 반복하였으나 1366년(공민왕 15)에 다시 군으로 승격되어 밀양부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

고려 말 행정 구역의 잦은 개편이 공민왕 대에 정착 되면서 조선 시대에는 독립된 행정 구역으로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 다만 행정 구역의 변경이 잦았다. 1405년에는 10도제의 시행으로 경상도 청도군이 되었다. 1398년(태조 7)에 경상 좌도와 우도가 분리될 당시 경상 좌도에 속하였다. 1413년에는 다시 지방 제도가 개혁되면서 밀양 도호부에서 대구 도호부로 속하게 되었다가 1433년 다시 밀양 도호부로 환원되었다. 이후 1458년 다시 대구진에 속하기도 하는 등 청도군은 지방 행정 개혁에 따라 변동이 자주 일어났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1832년 상읍내면, 차읍내면, 내서면, 외서면, 내종도면, 상북면, 차북면, 하남면, 상남면, 외종도면, 적암면, 중동면, 동일위면, 동이위면 등 14면으로 편성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 이후 전국이 23부로 나누어지자 청도는 대구부에 속하게 되었고, 이듬해 지방 제도 개편으로 인한 13도제 실시로 3등 군으로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1906년 대구에 속했던 풍각면·각남면·각북면 지역이 편입되었다.

[근대]

개항기 청도군은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위정척사 운동에 근거하여 의병 부대를 조직하고자 했던 박시묵의 활동을 비롯하여 대한 제국기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면서 의병 운동과 계몽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이후 일제 강점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청도군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는 1911년 외서면이 밀양군으로 이관되고 밀양군에 속해 있었던 청도면 사상동이 청도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4년 행정 구역을 통합 정리하는 과정에서 각 면이 통폐합되어 대성, 화양, 각남, 풍각, 각북, 이서, 운문, 금천, 매전, 종도면 등 10개 면이 되었으며 고미면의 일부인 지천, 봉하, 정상, 마일동운문면에 편입되었다. 1919년에 종도면이 매전면, 금천면에 분할 편입되어 총 9개면이 되었다. 1940년 11월 대성면이 청도면으로 개칭되었고, 1946년 8월 13일에 청도읍으로 승격되었다.

[현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청도군은 운문산비슬산 일대를 거점으로 6·25 전쟁 당시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 피난처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청도군은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인 청도읍 신도리를 시작으로 새마을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특히 1970년 9월 국토 보전 화보집에 신도 마을이 소개되면서 ‘국토 보존 사업’ 시범 지구로 선정되고 1972년 7월 15일 대통령 표창 수상과 함께 전국적으로 새마을 발상지 청도를 알리게 되었다.

이후 1974년 청도군은 청도읍유호리, 화양면의 남성현에 2개 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9년 화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에는 이서면 고면리흥선리(興善里)로 개칭되었다. 1992년 금천면 방지리 일부가 운문면에 편입되어 운문면 방지리가 신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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