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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014
한자 比丘尼道場雲門寺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길 264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진관스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4년 5월 20일 - 불교 정화 운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5년 - 비구니 초대 주지 승려 금룡 부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8년 - 비구니 전문 강원인 운문사 강원 개원, 제8차 운문사 중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2년 4월 - 대한 불교 조계종 등장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0년 - 한국 불교 태고종 창종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7년 - 제8대 주지 승려 명성 부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2년 - 운문사 강원을 운문 승가 학원으로 개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 - 운문 승가 학원을 운문 승가 대학으로 개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7년 - 운문 승가 대학원 개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9년 - 운문 승가 대학원 제1회 졸업생 배출
해당 소재지 운문사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지도보기

[운문사 호거산에 자리 잡다]

운문사(雲門寺)는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동쪽으로 100리[약 39㎞]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이다. 청도군에 속해 있으나 교통 편의상 대구에 연접해 있다. 호거산[운문산] 아래 자리 잡은 명찰로서 역사는 신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 신승(神僧)이 ‘오갑사(五岬寺)’라 이름 짓고 가운데를 대작 갑사(大鵲岬寺)라 하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네 개의 암자를 지었다. 이때 왕이 승지(勝地)에 절이 창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원찰(願刹)로 삼았다고 한다. 이후 여러 차례 중창되었는데, 제1 중창은 600년경 원광 국사가 하였으며, 가슬 갑사에 옮겨간 뒤에 세속 오계를 제정하여 전수하고, 수나라 30만 대군의 지원을 받게 한 걸사표(乞師表)도 이곳에서 쓴 것으로 추측된다. 제2 중창은 보량 국사가 930년에 하였고, 고려 태조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賜額)과 땅 500결을 내렸는데 이때부터 ‘운문사’라 부르게 되었다. 제3 중창은 원응 국사가 하였고, 1105년에 운문사에 들어와 법도를 세워 전국 제2의 선찰(禪刹)이 되었다.

운문사는 1250년에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선사가 주석하였고, 그 후 많은 고승 대덕이 주석 수행하며 여러 차례 중창하여, 1913년에 제8 중창에 이르렀다. 현재 운문사에서는 조석 예불시 중창주인 원광 국사, 보량 국사, 원응 국사를 3대 조사로 예경하여 모시고 있다.

[불교 정화 운동과 운문사]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의 불교는 일본의 불교 정책에 따라 대처승들이 많이 생겨났다. 한국 전통 불교에서는 승려의 청정한 독신 생활을 고수하였지만,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은 승려들에게 회유와 강요로 결혼을 요구하여 많은 대처승들이 생겨났다. 대처승은 결혼하여 아내와 자식을 둔 승려를 말하는 것으로, 일본은 메이지(明治) 시기 이후 대처승 중심의 일본 불교 성향을 그대로 한국 불교에 이식하려는 종교 정책에 펼쳤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한국 불교계에서는 대처승의 수가 독신의 비구(比丘)[출가하여 불교의 구족계인 250계를 받고 수행하는 남자 승려]보다 월등히 많아 이미 기득권층이 되었으며, 운문사 역시 광복 이후 제1대 주지인 승려 김상명부터 제4대 주지인 승려 박상웅까지 대처승이었다.

하지만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정권이 대처승은 사찰을 떠나라는 내용의 정화 유시를 발표하는데, 이는 일제의 잔재인 대처승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음과 이들을 한국 불교에서 축출하겠다는 의지에서 표명된 것이다. 1954년 불교 정화 운동은 근본 불교로의 회귀와 민족 불교의 회복을 이념으로 전개된 것으로 일제 강점기 동안 침투된 일본 불교와 식민지 불교 정책에 따른 왜곡된 한국 불교의 청정성을 회복하고자 한 불교 혁신 운동이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대처승의 존재였다. 비구 측에서는 승려가 속인과 똑같이 처자식을 거느리는 것은 불교 계율의 파괴를 의미하고, 불교계의 모든 부조리의 근원으로 인식하였다. 이 운동은 1962년 4월 통합 종단 ‘대한 불교 조계종’의 등장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이후 비구 측에서 통합 종단에 반대하였고, 1969년 10월 비구 측은 대법원에 승소하고, 1970년 대처승 측은 한국 불교 태고종으로 창종하였다. 불교 정화 운동 과정에서 비구와 대처승 간의 첨예한 갈등을 비롯한 많은 문제점을 낳기도 하였다.

한편 사찰 정화 유시에 따라 비구들과 함께 비구니(比丘尼)[출가하여 불교의 구족계인 348계를 받고 수행하는 여자 승려]들도 절을 맡게 됨으로써 운문사에는 대처승이 물러나고 대신 비구니가 수행하는 도량으로 바뀌게 되었다. 1954년 불교 정화 운동이 비구 쪽으로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비구니들도 사찰을 맡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운문사가 아닌 동화사를 맡았다. 불교 정화 운동에 참여한 비구니들이 중심이 되어 동화사를 맡았던 것이다. 비구니 승려들이 열악한 주변 여건 속에서도 불교 정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공로가 인정된 결과였다. 비구니 승려들이 동화사를 정비하고 강원 설립에 힘을 쏟고 있을 무렵 비구들이 본사인 동화사를 비구니에게 내줄 수 없다며 반발하였다. 어쩔 수 없이 비구니들은 1년 만에 동화사를 비구에게 넘겨주고 동화사 말사인 운문사로 옮겨 갔다. 당시 종단 내에서 비구니에 대한 차별 대우가 어떠했는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비구니 도량으로 거듭나다]

초대 주지로 승려 원광 금룡[1892∼1965]이 임명되면서 바야흐로 운문사가 비구니 사찰로서 새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1958년에 초대 강백으로 통도사 강주 승려 오혜륜을 모시고 비구니 전문 강원이 개설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전문 강원은 1956년 계룡산 동학사에서 주지 승려 대현이 승려 경봉을 모시고 개설한 동학사 강원이었다. 운문사 강원이 바로 그 뒤를 이어 개설된 것이다. 당시 승가 학원의 교육은 전통 방식대로 사미과(沙彌科), 사집과(四集科), 사교과(四敎科), 대교과(大敎科) 과정의 4단계로 나누고, 이수 연한은 10∼11년으로 하였다.

승가 학원을 개설한 승려 금룡은 운문사가 불교 정화 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 강원 교육의 중심 도량으로 발전하는 데 초석을 마련하였다. 승려 금룡은 근현대기에 비구니 법사로서 수행과 포교, 후학 양성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며, 1909년 18세 때 운문사 청신암에서 승려 선덕을 은사로 하여 출가하였다. 1922년 승려 구하에게 월광이라는 법호를 받고 건당(建幢)[출가 후 오랜 기간 수련하여 학덕과 수행의 경력이 높아 다른 제자를 기를 만한 능력이 있다고 큰스님으로부터 인가받는 것]하게 되는데, 당시 비구니가 비구에게 건당한 최초의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 뒤로 30여 년간 전국 방방곡곡으로부터 법문 행각을 나선 후 1955년 비구니 도량으로 변모한 운문사에 초대 주지로 부임하였다. 이는 당시 승려 금룡이 비구니들의 불교 정화 운동 참여를 적극 독려함으로써 불교계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운문사 주지로 재직하면서 승려 금룡은 경전 교육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대적인 안목에서 전하고자 비구니 강원을 설립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체계적인 강원 교육을 통해 올바른 불교 정신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1958년 통도사 승려 오혜륜을 모시고 비구니 전문 강원이 ‘운문사 강원’을 설립하였다. 승려 금룡은 일찍이 승려 수옥·혜옥과 함께 비구니 3대 강백으로 꼽힐 정도로 학문에 뛰어났으며, 특히 비구니도 법맥을 이을 수 있음을 강조하며, 1958년에 운문사에서 법제자인 승려 광우에게 장삼과 단주를 전하는 건당식을 행하였다. 이것은 한국 불교사에서 비구니가 비구니에게 건당한 최초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이후 운문사는 1977년 전 승려 명성이 제8대 주지에 부임하며 새로운 시기가 도래하였다. 승려 명성은 제8대 주지부터 제12대 주지까지 5대를 연임하였고, 운문사는 이 기간에 제9차 중창이 이루어지며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범종이 주조되고 관음전, 양진당, 만세루, 설현당, 죽림헌, 채경당, 청풍료, 삼장원, 선열당, 전향각, 범종루, 대웅보전, 사리암 요사, 문수 선원 등 49동[신축 39, 보수 10]이 신축 및 보수되었으며 오늘과 같은 대 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국 최초 비구니 승가 대학원]

근대 한국 불교사에서 최초의 비구니 전문 강원은 동학사 강원이다. 이전 강원 제도에 따른 승가 교육은 오직 비구들을 대상으로 했을 뿐 비구니 스님은 철저히 배제된 상태로서, 교육을 받고 싶어 하는 비구니들은 비구 강원이나 비구 강사를 찾아가 따로 청강을 하거나 개인 지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비구니 교육의 필요성과 함께 강원이 설립되었는데, 최초의 비구니 강원은 주지인 승려 대현이 승려 경봉을 모시고 개설한 ‘동학사 강원’이다. 일부 일제 강점기 시기 해인사의 국일암[1913년 추정]이나 통도사의 옥련암[1918]이 최초의 강원으로 거론되기도 하지만, 교과 과정과 규모 등에서 미흡한 점이 많이 전문 강원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1958년 운문사 강원은 사미과,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 4단계로 나누어 이수 연한 10∼11년으로 하는 전통 강원의 체제를 따라 설립되었다. 운문사 강원의 최초의 비구니 강주는 승려 묘전이 주지[1962∼1966]일 때 부임한 승려 묘엄이었으며, 1982년 비구니 강사 회의에서 강원의 명칭을 ‘승가 학원’으로 통일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운문사 강원을 운문사 승가 학원으로 개칭하였다. 1985년 수업 연한을 4년으로 결정하고 사미니과[1학년], 사집과[2학년], 사교과[3학년], 대교과[4학년]으로 구분하였고, 1987년 승가 학원의 명칭을 승가 대학으로 고쳐 ‘운문 승가 대학’으로 개칭하였다.

1997년 3월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 기관으로 최초의 비구니 승가 대학원인 ‘운문 승가 대학원’이 개설되었다. 운문 승가 대학원의 초대 원장에는 승려 명성이 취임하였다. 2003년 10월 제8대 전국 비구니회 회장에 취임하며 비구니계의 수장직을 맡기도 한 승려 명성은 비구니 승단의 위상을 높이고, 비구니 승단의 필요성과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운문 승가 대학원은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룬 승가 교육을 지향하고, 체계적인 경전 교육을 통한 전문 강사인력의 양성을 목적으로 개설되었으며, 1999년 1월 제1회 졸업생 6명을 배출하였다.

2011년 제47회 졸업식을 치른 운문 승가 대학은 그동안 배출한 졸업생 수는 1천 700여 명을 넘어섰으며, 국내 비구니 승가 대학 가운데 최대 규모와 학인 수를 자랑하고 있다. 특히 운문사의 승가 대학은 국내 5개 비구니 강원 중 학풍이 가장 엄격하다고 알려져 있다. 출가한 후 행자 생활을 하는 예비 승려인 사미니계 소지자들이 입학해 4년 동안 공동생활을 하며, 졸업 후에 비구니계를 받을 수 있다. 경전과 염불 공부 이외에 영어, 컴퓨터, 피아노, 서예, 요가, 꽃꽂이 등도 선택해서 공부해야 하며, 학문과 노동을 함께 하는 자급자족도 병행해야 한다.

[비구니 도량으로서 운문사]

청도 팔경 중 하나인 운문효종(雲門曉鐘)은 새벽 3시 운문사 도량에 퍼지는 종소리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산사의 아침을 깨우는 도량석 목탁 소리와 종송, 예경, 축원 등으로 이어지는 예불은 운문사를 깨운다. 비구니 도량으로서 엄격한 수행을 행하는 운문사의 분위기와 새벽을 깨우는 이 종소리에 대한 감동은 운문사를 이야기하는 이들의 입에서 빠지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새벽 3시 28번 울리는 범종의 소리와 함께 비구니 승려들의 목소리가 무반주 여성 합창으로 법당 안에 가득 울려 퍼지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그 숭고함과 경건함으로 그리고 장엄함으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하루를 여는 새벽 예불에서 독경 소리는 그저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라 불심을 향한 비구니 스님들의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어느 사찰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장엄함을 담고 있으며, 운문사가 비구니 도량으로서 대표될 수 있었던 배경을 보여 주기도 한다.

새벽 3시 종소리를 시작으로 깨운 운문사는 하루 관광객 수천 명이 찾는 사찰과는 달리 정결함과 단아함을 보여 준다. 대부분의 사찰이 계단식 구조를 통해 불교적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는 데 반해 운문사는 가람 전체가 평지에 조성되어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불전과 비구니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와 수행하는 강원이 사람들을 피해 남쪽에 배치되어 있다.

비구니 스님들의 생활과 수행의 공간인 요사와 강원은 불전과 구분되어 운문사 남쪽에 주로 배치되어 있으며,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서쪽 극락교를 건너 죽림헌목우정이 있고, 대웅보전의 오른편에 전향각이 있으며, 뒤편 개울을 건너면 다실이 위치한다. 일반인들에게는 불전이 수행 공간보다 넓어 보이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불전보다 요사와 강원이 차지하는 공간이 넓어 운문사가 비구니 승려들의 수행 도량임을 짐작하게 한다. 운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요사인 금당은 1912년 개축되었다. ‘ㄱ’자 모양의 건물로 동서로는 팔작지붕을 채택하고, 남쪽으로 뻗은 금당은 낮은 기단 위에 마련된 댓돌을 밟고 툇마루가 위치하며,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강당 겸 요사로 쓰이는 공간이 나온다. 청풍료운문사의 대중들이 모이는 가장 큰 방으로 사미니와 사집과 스님들의 요사로 사용된다. 운문사의 도서관 겸 강사 스님들의 연구실로 사용되는 삼장원은 150여 명의 학인이 동시에 책을 읽을 수 있는 큰 열람실을 가지고 있으며, 『화검경』을 비롯한 각종 경전이 구비되어 있고 그 가운데 고서 5000여 권이 보관되어 있다. 학인들의 수행을 위한 여유 공간으로서 1996년 수목원과 다실 등이 조성되어 있다. 불전 구역에 자리한 유일한 요사인 전향각은 담장을 둘러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하도록 하고 있다.

[운문사 세상과 함께 나누다]

운문사만세루 벽에 그려진 부처님과 아이들이 함께 뛰어노는 모습을 그린 불화를 중심으로 세상과 함께 나누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고 있다. 1982년 7월 제1회 즐거운 어린이 여름학교를 시작으로 운문사에서는 매주 일요일 어린이 법회와 여름마다 실시되는 여름 불교 학교를 시행하고 있다. 여름 불교 학교는 해마다 여름 2박 3일 250여 명의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마련되며 ‘모이자! 숲속 나라로’, ‘부처님 마음 내 마음’, ‘나눌수록 넘치는 자비의 샘물’ 등 자비심이나 발원과 관련된 불교적인 주제로 진행된다.

일요 어린이 법회는 인근 지역 아이들을 대상으로 개최되고 있다. 어린이 교육에 대한 운문사의 각별한 관심은 2008년 3월 4일 개원한 운문 유치원으로 알 수 있다. 경상북도 경산시 사동에 위치한 운문 유치원은 생명 존중, 자연 환경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데 중점을 두고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2011년 현재 운문 유치원은 부처님의 10대 제자 이름을 딴 가섭반, 아난반 등의 7반에 총 175명의 원생이 다니고 있다.

이 밖에 운문사에서는 세상과 함께 나누기 위한 방법으로 정기 간행물 형식의 잡지 『운문』을 편찬하고 있다. 운문은 1년에 총 4회 발행하는 것으로 1982년 7월 22일 8절 용지 4면 양식으로 시작되었고, 그 지면이 계속적으로 늘어나면서 1995년 51호부터 16절지 용지 50면 지면의 계간지 형식이 되었다. 이후 1995년 3월 29일 정기 간행물로 등록되었으며, 2011년 여름호 117호까지 이어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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