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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005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
집필자 박승규

[개설]

청도 지역에는 고대에 이서국(伊西國)이 존재한 것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의 역사 기록에 전해져 오고 있다. 이서국은 기원 1∼3세기경에 영남 지역에 존재하였던 삼한[진한]의 소국 가운데 하나로서,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상당한 수준의 세력을 가진 정치 집단으로 평가된다. 이들 소국에 대해서는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東夷傳)에 소국들의 성격과 사회상이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도 단편적이나마 이들 소국에 관한 기사가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학계의 불신으로 연구의 한계도 있지만 최근 고고학 연구에 의해 구체성을 띠며 새로이 검토되고 있다.

이서국의 명칭은 『삼국지』에는 보이지 않으며 국내 최고의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서국에 관한 역사 기록은 『삼국사기』에 이서국의 잔존 세력이 신라 금성을 공격한 내용이 전해지고, 『삼국유사』에는 이서국의 위치, 이서국의 멸망, 죽엽군의 설화가 상세히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이서국의 금성 공격과 죽엽군의 기록을 통해서 이서국의 존재와 그 세력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으며, 아울러 사로국의 성장에 따른 주변 소국들의 병합 사실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신라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이서국의 문헌 자료]

이서국에 관한 문헌 자료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들 수 있으며, 후대의 지리지에도 단편적인 내용들이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례이사금 14년 조[서기 297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 伊西古國來攻金城 我大擧兵防禦 不能攘 忽有異兵來 其數不可 勝紀人皆珥竹葉 與我軍同擊賊破之 後不知其所歸 人或見竹葉數萬 積於竹長陵由是國人謂 先王以陰兵助戰也 ……”[이서고국에서 금성을 공격하므로 대병을 일으켜 방어하였으나 쉽게 물리치지 못하고 있던 차 갑자기 다른 군사가 몰려오는데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으며 사람마다 머리에 대나무 잎을 꽂았다. 그 군사가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쳐부수고서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으며 혹자는 단지 대나무 잎 수만이 죽장릉에 쌓인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선왕께서 신병을 보내어 싸움을 도운 것이라고 일렀다.] 이 기록에 의하면 옛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한 사실과, 신라가 죽엽군의 도움 없이는 쉽게 방어하지 못할 정도로 이서국의 군사력이 강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 기이 편에는 각각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전하고 있다. “弩禮王十四年 伊西國人來攻金城 按雲門寺古傳諸寺納田記云 貞觀六年壬辰 伊西郡 今郚村零味寺納田 則今郚村今靑道地則淸道郡 古伊西郡(券一 伊西國條)”[노례왕 14년에 이서국 사람이 와서 금성을 쳤다. 운문사에 예부터 전해 오는 「제씨 납전기」를 보면 정관 6년 임진에 이서군의 금오촌 영미사가 밭을 바쳤다 하였으니 금오촌은 지금 청도 땅이며 청도는 즉, 옛 이서군이다.(권1 이서국 조)]

“…… 改定六部號 仍賜六姓 始作兜率歌 有嗟辭 詞腦格 始製黎耕及蘠永庫 作車乘 建虎(武)十八年 伐伊西國滅之 是年高麗兵來侵(券一 第三 弩禮王條)”[6부의 이름을 개정하고 또 6성을 하사하고 비로소 도솔가를 지었는데 유차사와 사뇌격이 있었다. 여경과 장빙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호(무) 18년에 이서국을 쳐서 멸망하였고 이 해에 고구려병이 와서 침범하였다.(권1 제3 노례왕 조)]

“…… 第十四儒理王代 伊西國人來攻金城我大擧兵防禦 久不能抗 忽有異兵來助 皆珥竹葉 與我軍竝力擊賊破之軍退後不知其所歸 但見竹葉積於未鄒王陵前 乃知先王陰 騭有功 因號竹現陵(券一 未鄒王竹葉軍條)”[제14대 유리왕 때에 이서국 사람이 와서 금성을 공격하니 우리도 크게 병사를 모아 막았으나 오래 지탱하기 어려웠다.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와서 우리를 돕는데 모두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아군과 힘을 모아 적을 격파하였다. 군사가 물러간 후에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대나무 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음을 보고 비로소 선왕의 음조의 공인 줄 알고 이로 인하여 죽현릉이라고 불렀다.(권1 미추왕 죽엽군 조)]

『삼국유사』 기사에는 이서국의 위치, 이서국의 멸망, 죽엽군의 설화 등 구체적인 내용이 전하고 있다. 특히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미추왕 죽엽군 조 기사에는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낯선 군사의 출현으로 적을 물리쳤으며 이는 미추왕의 숨은 도움이었다는 설화의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 이서국이 상당한 수준의 세력을 가진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3대 노례왕 14년[서기 37년]의 표기는 착오에 의한 것으로서, 대체로 3세기 후엽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이서국의 위치와 도읍]

『삼국유사』의 이서국 조에는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신라 선덕 여왕 즉위년인 632년]에 이서군 금오촌의 영미사에서 운문사에 납전을 하였는데, 금오촌은 지금의 청도군 땅이며 청도군은 옛 이서군이었다.”라고 한다. 이로 미루어 이서국이 멸망한 뒤에도 선덕 여왕 대에 이르기까지 청도 지역이 이서군으로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서국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청도 지역으로 보는 것이 공통된 견해이다.

그리고 이서국에는 중심 세력이 되는 3성[현]이 있었으며, 이들은 솔이산성(率伊山城)[소산현(蘇山縣)], 경산성(驚山城)[가산현(笳山縣)], 오도산성(烏刀山城)[또는 오악(烏岳)·오구(烏丘)·오례(烏禮)·오혜(烏惠)]의 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3성[현]의 위치와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청도군 고적 조를 보면 폐성(吠城)을 둘러싼 전쟁 설화가 있는데, 이는 이서국과 신라의 전쟁 가운데서 생겨난 설화로서 폐성이서국의 주요 산성임을 알 수 있다. 또, 『오산지(鰲山誌)』에는 폐성이서산성이라 전하고 있으며, 『대동지지(大東地志)』 청도 고읍 조에서는 폐성형산현이며 이서국의 옛터라 하였다. 이로 미루어 폐성이서산성으로 가산현[형산현]에 해당되고, 솔이산성매전면 일대, 오도산성은 유천 북쪽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이서국의 옛 영토가 청도 지역이라는 것과 이서국의 중심을 이루던 3성[현]의 위치는 밝혀졌으나 이서국의 도읍지에 대해서는 기록에 전하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1832년에 간행된 『청도군 읍지』 고적 조를 보면 이서고성은 군의 북쪽 10리에 있으며 4면이 모두 토축으로 주위가 일천여 척이며 이곳을 이서 고지라 전한다고 하였으며, 1942년 조선 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서도 이서면 토평리를 이서국의 읍지라 하였다. 이러한 기록에 근거하여 백곡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토평리 백곡 마을을 유력한 이서국의 도읍 후보지로 볼 수 있다. 이는 고토성과 고분군의 분포 및 청도천과 넓은 들판의 존재로 보아 고고학적 관점에서도 상당히 가능성이 높으며, 이에 더하여 폐성[이서산성]은 이서국의 도읍을 방어하는 중요한 전초 기지로 볼 수 있다.

[이서국의 유적과 유물]

문헌 기록에 전하는 이서국의 역사는 대체로 기원후 1∼3세기의 일들이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청도 지역의 유적들이 이서국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겠으며, 이 시기는 고고학적으로 원삼국[진한·변한] 시대에 해당된다. 원삼국 시대에는 목관·목곽묘와 움집터를 비롯하여 와질 토기가 대표적인 고고학 자료이고 목책 토성이 나타나는 시기로 추정할 수 있다.

이서국의 원삼국 시대에 해당되는 유적으로는 이서국 성지로 알려져 있는 백곡토성과 이서산성[폐성 또는 주구산성으로도 불리어짐]을 들 수 있으나, 아직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바 없어 추정만 할 뿐이다.

백곡토성은 백곡 마을을 감싸고 있는 해발 100∼120m의 구릉 남쪽 부분에 만들어져 있으며, 토루는 길이 200여 m에 이르고 높이 1∼3m, 폭 2∼3m를 이루기도 하나 대부분 경작에 의해 삭평되거나 밭둑으로 이용되고 있다. 주변에서 연질 토기 편을 비롯하여 5∼6세기경의 신라 토기도 채집되는 것으로 미루어, 백곡토성은 이서국 시기인 3∼4세기경에 처음 만들어졌다가 신라에 복속된 이후에도 계속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서산성은 신라 유리왕이서국 침공 설화에서 폐성(吠城)의 유래를 지닌 토성지로서, 현재의 화양읍 소라동청도읍 송읍리 사이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주구 형상의 돌출된 지대이며 정상부에는 넓은 평지가 만들어져 있다. 근래에 예비군 훈련장으로 사용되어 일부 지형의 변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대체로 원상을 유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벽으로 추정할 만한 토루 부분이 북동쪽에 일부 남아 있으나 명확치는 않으며, 우물터와 문지로 추정되는 곳도 있다. 성지 내부에서는 4세기 대의 토기 편을 비롯하여 고려 시대의 토기 편과 기와 편도 다수 보인다. 이서산성은 지대가 험준하고 협소하며, 북쪽 능선을 따라 이서국 도읍지인 백곡토성 쪽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존재할 뿐 아니라 입지상 주위를 조망하기에 적합하여 이서국의 전초 기지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 이서국의 고지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는 청도 신당리 유적 발굴 조사에서 이서국 당시의 고고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원삼국 시대의 원형과 방형계 움집터가 확인되었으며, 여기서는 원삼국 시대의 와질 토기로 알려져 있는 조합식 우각형 파수부호[쇠뿔 손잡이 항아리], 주머니호[주머니 항아리], 타날문 단경호[두드린 무늬 항아리]가 출토되었다. 이들 고고 자료는 영남 지방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비추어 볼 때, 기원후 1∼3세기 삼한 소국들의 존재와 그 문화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이로 보아 문헌에 보이는 이서국의 배경 문화를 이들 고고 자료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으며, 또 이들 고고 자료는 인접한 경산의 고대 소국인 압독국 유적에도 동일하게 분포하고 있어서 앞으로의 비교 연구가 주목된다.

한편 이서국의 고지인 청도 분지의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청도천 주변의 진라리, 무등리, 범곡리, 송북리, 눌미리, 합천리, 칠성리, 화리, 신당리 등에는 다수의 청동기 시대 고인돌군이 무리를 이루어 분포한다. 그리고 이들 고인돌과 함께 진라리·송읍리·신당리 등에서 다수의 청동기 시대 집터와 돌검·민무늬 토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들 고인돌과 집터는 영남 지역 청동기 시대의 대표 유적으로 꼽히고 있어 이서국의 앞 시기인 청동기 시대부터 청도 지역에 유력한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들 유력 집단이 이서국의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서국 이야기, 역사가 되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 고대 역사서에 남겨진 이서의 이야기는 자칫 전설처럼 여겨질 수도 있으나, 자세히 보면 그 속에는 이서국의 역사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청도에는 고대에 이서국이라는 소국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이서국의 도읍지가 어디였는지, 그 세력은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증과 관심이 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서국의 고지가 청도라는 사실은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오늘날 청도 산서 지방인 청도읍·화양읍·이서면 일대로 추정된다. 이서국의 도읍지 또한 청도군 화양읍이서면의 경계가 되는 토평 2리의 백곡 마을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백곡토성과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그리 멀지않은 곳에 이서산성이 자리 잡아 전초 기지의 역할을 수행했음도 알 수 있다.

이서국은 신라 초기에 금성을 공격할 정도의 유력한 집단으로 역사에 그 실체를 보여 주고 있으며, 신라의 죽엽군 설화에 보이듯이 이서국의 군사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서국의 존속 시기는 원삼국 시대인 기원전 1세기경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유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청도 분지에서 신라·가야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고고학 자료인 4세기 무렵의 고식 도질 토기가 소라리, 봉기리 등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5세기 이후에 신라 토기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점으로 보아 이서국은 5세기 이전까지 그 세력이 유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도의 이서국은 삼한 소국의 하나로서 역사 기록에 어렴풋이 남아 있지만,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청도천을 따라 열을 지어 분포하고 대규모 마을 유적에서 민무늬 토기와 돌검들이 발굴되는 것을 볼 때 청도에는 오래 전부터 이서국의 문화적 기반이 구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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