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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룡 의병 격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855
한자 崔翰龍義兵檄文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1907년 4월연표보기∼1908년 1월연표보기 - 「최한룡 의병 격문」 5건 작성
성격 격문
관련 인물 최한룡
용도 창의 격문
발급자 최한룡
수급자 김현진 등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청도군 출신의 의병장 최한룡이 작성한 의병 격문.

[개설]

「최한룡 의병 격문(崔翰龍 義兵 檄文)」은 경상북도 청도군 출신의 의병장 최한룡[1849∼1917]이 1907년 4월부터 1908년 1월에 다섯 차례에 걸쳐 발표한 격문으로,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국권 회복을 부르짖으며 국민들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하고 있다.

[제작 발급 경위]

최한룡은 1907년 7월 창의하여 의병 활동을 하다가 1908년 체포되어 대구 경찰서에 구속되어 취조를 받았다. 당시 내부 경무 국장이 통감부에 보고하였던 「김현진(金賢鎭)·최한룡(崔翰龍)의 진술서 초본 보고의 건」을 보면, 최한룡은 “신문이나 관보를 보니 신 협약이 체결되어 외국인을 관리에 임용하고 재정 규칙을 개정해서 일본인이 사무를 취급하는 모양이 되자 각 지방에서 폭도와 의병이 봉기해서 국운이 차제에 위급함에 임박하기에 이르렀기에 분개를 금하기를 묵시할 수 없어 드디어 격문을 기초(起草)하여 이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가의 위급을 구제하려는 생각을 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최한룡은 1908년경 청도 냉정리에 거주하는 김일준이 정기 구독하고 있던 『대한 매일 신보』와 『황성 신문』을 읽고 당시의 시국과 계몽 운동에 대해 이해하였다. 1907년 정미 7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의 한국 침략과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있는 상황에 분개하였다. 특히 『대한 매일 신보』에 연재되고 있던 「애급 근세사(埃及近世史)」를 읽고 크게 감격하였다. 최한룡은 ‘자주 자강(自主自强)’과 ‘개명 발달(開明發達)’을 통해 국권 회복을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908년 1월 ‘애급 근세사를 읽고 대한국의 위급을 탄함’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애급 근세사를 읽고 대한국의 위급을 탄함」은 전라남도 남평 출신으로 당시 적천사(磧川寺)에 머물고 있던 김현진(金賢鎭)을 비롯하여 각처에 발송되었다.

[구성/내용]

한말 정미 의병이 일어난 시기인 1907년 4월부터 1908년 1월 사이에 발표된 최한룡의 격문은 『폭도 격문(暴徒檄文)』 제2집에 수록되어 있다. 『폭도 격문』은 1907년 일본군의 조선 주차군(朝鮮駐箚軍)과 일본 경찰이 의병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격문이다. 대체로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수집된 것으로 각처에서 창의한 의병들이 발표한 격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폭도 격문』 제2집에 실린 최한룡의 격문은 「천하에 고시하는 문」, 「국채 상환 건」, 「단발 건」, 「애급 근세사를 읽고 대한국의 위급함을 탄함」, 「국체로써 적국을 토벌할 건」 등 모두 5건이다.

1907년 4월 발한 「천하(天下)에 고시(告示)하는 문(文)」에서 최한룡은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주살하고 친일파를 엄히 다스려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자고 역설하고 있다.

1907년 5월 발송한 「국채 상환 건(國債償還件)」에서 최한룡은 대구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국채 보상 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주장하고 있다. 당시 청도 지역에는 군민 의소(郡民議所)에 참여하고 있던 유림들이 청도군 국채 보상 의연회(淸道郡國債報償義捐會)를 조직하고 국채 보상을 위한 의연금을 모집하고 있었다. 최한룡은 격문에서 국채 보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나아가 의연금을 모집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907년 7월에 발한 「단발 건(斷髮件)」에서 최한룡은 일본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고 나아가 일제의 탄압을 강조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나와 같이 자수하여 갖은 악형을 받아 앉은뱅이 병신이 된 용감한 뜻을 가진 사람”이라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것은 1906년 4월 최한룡이 산남 의진에 참여하여 신광면 우각리에서 경주 진위대의 간계로 정용기가 체포된 뒤 자수하였으나 일본군의 악형으로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1908년 1월 발한 「애급 근세사를 읽고 대한국의 위급함을 탄함」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직면하여 백성들이 충성심을 모아야 할 때라고 호소하고 있다. 당시 『대한 매일 신보』에 연재되었던 「애급 근세사」는 당시 국민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08년 1월에 발한 「국체(國體)로써 적국을 토벌할 건」은 면암 최익현이 기초한 격문을 다시 발표한 것으로 “순국할 수 있는 죽음의 절개가 신민(臣民)된 도리요 삶”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경상북도 청도군 출신의 의병장 최한룡은 1907년부터 1908년 1월 사이에 다섯 차례의 격문을 발표하고, 1907년 7월 경 부하 70명을 거느리고 창의하였다. 「최한룡 의병 격문」은 청도 지역에서 일본의 한국 침략을 비판하고 국권 회복을 부르짖으며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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