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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룡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1135
한자 崔翰龍
이칭/별칭 순옥(順玉),금운(錦雲)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9년 3월 12일연표보기 - 최한룡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6년 4월 - 최한룡 산남 의진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7년 4월 - 최한룡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국권회복을 부르짖는 격문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07년 7월 - 최한룡 부하 70여 명으로 창의하여 청도·영천 등지에서 활약
활동 시기/일시 1909년 - 최한룡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합천 해인사에 은거
몰년 시기/일시 1917년 10월 26일 - 최한룡 밀양에서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7년 - 최한룡 건국 포장 추서
출생지 최한룡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지도보기
활동지 최한룡 활동지 - 경상북도 청도군
활동지 최한룡 활동지 - 경상북도 영천시
묘소 최한룡 묘소 -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 무학산 공동묘지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삼남 의진 의병장

[정의]

개항기 청도 출신의 의병장.

[개설]

최한룡은 1849년(헌종 15)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日谷里)에서 출생하여 1917년 사망하였다. 1905년 을사 늑약에 분개하여 1906년 산남 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였으며, 1907년 7월 청도에서 창의하였다.

[활동 사항]

최한룡(崔翰龍)[1849∼1917]은 1905년 을사 늑약에 분개하여 1906년 4월 산남 의진에 참여하였다. 이후 1907년 4월부터 1908년 1월 사이에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국권 회복을 부르짖는 다섯 차례의 격문을 발표하여 국민들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1907년 7월 부하 70여 명으로 창의하여 청도·영천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다섯 차례 발표한 격문 「천하에 고시하는 글」·「국채 상환 건」·「단발 건」·「애급 근대사를 읽고 대한국의 위급함을 탄함」과 「국체로서 적국을 토벌할 건」 등과 1908년 대구 경찰서 심문 조서 「김현진·최한룡의 진술서 초본 보고의 건」을 보면, 최한룡이 의병 투쟁에 참여하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최한룡이 『대한 매일 신보』와 면암 최익현의 격문을 읽고 의병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최한룡은 1909년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합천 해인사와 밀양에 거주하는 사위 박재하(朴在夏)의 집을 전전하며 신병을 치료하고 요양하였다. 뿐만 아니라 해인사에 은거하던 중 고운 최치원(崔致遠)의 영정을 발견하여 경주 최씨 관가정파(觀稼亭派)의 세거지인 일곡(日谷)에 옮겨 봉안하기도 하였다. 최한룡은 사위 박재하의 집에서 1917년 10월 26일 6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 무학산 공동묘지에 반장되었다.

가족들은 일본 관헌의 탄압을 피해 1909년 청도군 화양면 고평동(古坪洞)으로 이사했다가, 1912년 서간도로 이주하였고, 1921년 귀국하여 경상북도 경산군 안심면 용계동 95번지에 정착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7년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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