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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31
한자 省峴驛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홍갑

[정의]

조선 시대 경상북도 청도 관내에 있던 역참(驛站)의 하나.

[제정 경위 및 목적]

삼국 시대 이래 육상 교통로에 설치되었던 역은 고려를 이어 조선에서도 그대로 답습되었고, 군사적인 목적도 컸기 때문에 병조에서 관할하였다. 1535년(중종 30)에는 예전 고려 때의 역승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고 찰방 체제로 바뀌었다.

성현역 역시 고려부터 설치되었다가 조선으로 이어졌다. 조선 시대 역 운영은 41개의 역도(驛道)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는데, 당시의 역도는 행정 구역상의 도와 구분되는 교통 통신 기관을 지역 단위로 아우르는 별도의 도였다. 이 중에서 종9품 역승을 파견하는 역승도와 종6품 찰방을 파견하는 찰방도로 구분되었는데, 성현역은 찰방이 파견되던 곳이었다.

[관련기록]

『경국대전』 병전 역참 조항.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청도군 조항.

『성현도역지(省峴道驛誌)』

『성현도저리역가리정절목(省峴道邸吏役價釐正節目)』

[내용]

『경국대전』에는 17개의 역승도와 24개의 찰방도가 있었으며 524개의 속역(屬驛)이 있었다. 성현역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었다. 그리하여 성현역에 파견된 찰방이 인근의 14∼19개 정도의 역을 함께 관할하게 되었다. 성현도 소속 역들은 모두 소로(小路)[또는 小驛]에 속하는 역들이었다.

성현역에 소속되었던 역참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용가(龍駕)[밀양], 쌍산(雙山)[현풍], 내야(內野)[창녕], 일문(一門)[영산]. 범어(凡於)[대구], 유천(楡川)[청도], 설화(舌化)[대구], 금동(金洞)[밀양], 양동(良洞)[밀양], 영안(永安)[밀양], 온정(溫井)[영산], 오서(鰲西)[청도], 매전(買田)[청도], 무흘(無訖)[밀양], 유산(幽山)[대구], 서지(西芝)[청도] 등 도합 16개이다.그리고 999명의 역졸을 성현도 찰방이 관리했다.

성현역은 찰방이 파견된 역이기에 규모가 매우 컸는데, 아사(衙舍) 16칸, 수월정(受月亭) 10칸, 현산루(峴山樓) 6칸, 형지안고(形止案庫) 3칸, 창고 14칸, 창사청(倉舍廳) 6칸, 이청(吏廳) 10칸, 양마청(養馬廳) 5칸, 고사(庫舍) 3칸, 관주(官廚) 8칸, 고사(庫舍) 4칸, 민고(民庫) 6칸, 접빈관(接賓館) 4칸, 사창고사(社倉庫舍) 6칸, 사창사(社倉舍) 4칸, 형리청(刑吏廳) 4칸, 외양간(외養間) 5칸 등 모두 114칸 규모의 건물이 건립되었다. 성현역의 역속(驛屬)은 일정한 역역(驛役)을 부담하며 역에 본적을 두고 있는 역인(驛人)의 총칭으로 『성현도역지』에 따르면 역리(驛吏) 15명, 지인(知印) 10명, 사령(使令) 10명, 관노(官奴) 12명, 관비(官婢) 9명이 배치되었다. 성현도 속역(省峴道屬驛)은 대마(大馬). 중마(中馬). 복마(卜馬)로 나누어 146필을 보유하였으나 순조 2년(1802) 100여 필이나 감소해 있었다.

[변천]

찰방(察訪)이 파견되는 성현도의 관할 범위는 청도(淸道)∼밀양(密陽), 청도∼경주(慶州), 청도∼창녕(昌寧), 현풍(玄風)∼창녕∼영산(靈山) 등에 이어지는 역로(驛路)였다. 여기에 속하는 역은 밀양의 용가(龍駕)·금동(金洞)·양동(良洞)·수안(水安)·무흘(無訖)·유산(幽山), 현풍의 쌍산(雙山), 청도의 유천(楡川)·오서(鰲西)·매전(買田)·서지(西芝), 창녕의 내야(內野), 영산의 일문(一門)·온정(溫井), 대구의 범어(凡魚 또는 凡於), 성주의 설화(舌火 또는 舌化) 등 16개 지역이다. 뒤에 장수도(長壽道 또는 長水道)[신녕]에서 압량역(押梁驛)[지금의 경산]·김천도(金泉道)[지금의 김산]에서 금천역(琴川驛)[지금의 대구]이 편입되었고 성현도에서 용가·금동·수안·무흘역 등이 양산의 황산역(黃山驛)[지금의 양산]에 편입되고, 밀양의 양동역(良洞驛)은 창원의 자여도(自如道)로 편입되었다. 이 역도는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존속하였다.

[의의와 평가]

전통 사회에서 역참 제도는 교통 통신만이 아니라 군사적 목적이 매우 컸다. 그리하여 병조에서 관할하게 하였는데, 청도의 성현역은 인근 10여 개의 역을 관할 통솔하는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된 역이란 점에서 교통 통신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근대 개화기에도 적용되어 경부선이 이 지역을 통과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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