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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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水湯石橋碑群 |
영어의미역 | Monuments of Sutang Stone Brid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원북리 61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현정 |
성격 | 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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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호패형 |
건립시기/일시 | 사적비 1675년|석교비 1740년|중수비 1898년 |
재질 | 화강암 |
높이 | 사적비 75㎝|석교비 90㎝|중수비 80㎝ |
너비 | 사적비 38㎝|석교비 41㎝|중수비 37㎝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원북리 618 |
소유자 | 논산시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원북리에 있는 조선시대 수탕석교에 대한 3기의 비석.
[개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석성현조」에 “수탕포와 수탕석교가 석성현의 동쪽 7리에 있고, 수탕원이 동쪽 13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성동면 지역이 포구에 원과 다리가 있는 중요한 교통 요지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수탕석교를 중수하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긴 수탕석교비군은 사적비, 석교비, 중수비 3기인데, 각각 1675년(숙종 1), 1740년(영조 16), 1898년(고종 35)에 건립되었다. 한편 수탕석교는 1998년 성동면 원북리 주민이 매장된 다리를 확인하기 위한 퇴적토 제거 작업 중 석교의 부재들이 큰 손상을 입었다.
이에 논산시에 이러한 정황을 파악하고 충남대학교박물관에 발굴 조사를 실시토록 의뢰하여 석부를 수습, 정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중수비가 발견되었다. 중수비는 현재 남아 있는 3기의 비석 중 가장 최근의 것으로 홍수에 파손된 부분을 중수하여 세운 비이다. 중수비를 통해 오랜 세월 동안 수차례의 중수와 복구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치]
논산에서 부여 방면으로 국도 4호선을 타고 약 8.91㎞ 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약 1㎞ 가다가 좌회전하면 수탕석교가 나온다. 수탕석교비군은 수탕석교 바로 앞에 있다.
[형태]
사적비는 높이 75㎝, 너비 38㎝, 두께 14㎝, 자경 4㎝이다. 석교비는 높이 90㎝, 너비 41㎝, 두께 21㎝, 자경 3.6㎝이다. 중수비는 높이 80㎝, 너비 37㎝, 두께 17㎝이다. 3기 모두 머리 부분이 둥근 원두 형식으로, 화강암 재질로 제작되었다.
[금석문]
수탕석교비의 앞면에는 ‘석성수탕교비(石城水湯橋碑)’라 되어 있고, 비를 중수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있다. 또한 ‘건륭오년경신사월일개중수(乾隆五年庚申四月日改重修)’이라고 새겨져 있다. 사적비 앞면에는 ‘수탕석교사적비(水湯石橋事蹟碑)’라 되어 있고, ‘강희십사년삼월일립화주이언립(康熙十四年三月日立化主李彦立)’이라는 기록도 있다. 비의 재건을 위해 도움을 준 사람 사람들의 이름을 새겼다. 중수비의 앞면에는 ‘석성수탕교중수비(石城水湯橋重修碑)’라고 되어 있고, ‘광무2년무술 11월일입(光武二年戊戌十一月日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황]
사적비는 2004년 다리 복구 공사 때 새로 발견된 비로, 수탕석교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1675년(숙종 1)의 것으로 장마로 유실될 때마다 다시 복구하거나 수리하여 세운 내력이 공사 때마다 세워졌는데, 그 이전의 비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비석들이 오랜 세월 물속에 침수되어 있어 비신의 마모가 심하다.
[의의와 평가]
사적비, 석교비, 중수비 등을 통해 시대에 따라 조선시대에 석교의 형태나 건립 양식의 모습이 바뀌어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또한 수탕석교를 통해 강을 가로지르는 육로 교통로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