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1734 |
---|---|
한자 | 長者-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한석수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에서 장자골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장자골 새터마을 이야기」는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신대마을 뒤에 있는 장자골에 얽힌 풍수설화이다. 처음 부분은 원주변씨(原州邊氏)가 장자골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고, 명당 터에 선대 묘를 모셔 그 후에 발복(發福)하였다는 명당획득담이다. 중간 부분은 선대 묘를 옮긴 뒤 원주변씨 후손들이 쇠락하여 마을 터가 지금은 들로 바뀌었다는 명담방치담이다. 마지막 부분은 나암(懶庵) 보우대사(普雨大師)[1509~1565]를 죽게 한 제주목사였던 변협(邊協)[1528~1590]에게 원한을 갚았다는 어떤 승려의 보복배경담이다.
[채록/수집상황]
2004년 진천상산고적회에서 간행한 『진천의 구비문학』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과 상신리 상가 우렁터마을 사이에 신대마을이 있고, 그 마을 뒤를 장자골이라 한다. 이 마을은 조선 연산군 때에 서울에서 벼슬을 내놓고 낙향한 원주변씨 선비가 새로 터를 정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정착한 원주변씨 댁에서는 문백면 평산리 성조동 앞산에 조상 묘를 모시고부터 자손도 번성하고 재산과 벼슬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장척마을, 우렁터마을 등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런데 광해군 때에 허술하게 차려 입은 처사가 사랑방에 기숙하면서 주인을 속여 평산리로 묘소를 이장시킨 일이 있었다. 이장 묘는 전에 있던 묘소에서 전방 약 5㎞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선대 묘를 이장하자 원주변씨 댁에서는 서울에서 벼슬을 하던 후손이 낙향하게 되고 차츰 자손도 줄어들었다. 나중에는 신대마을도 폐동이 되어 지금은 들로 변하여 흔적도 없고, 장척마을과 우렁터마을에는 그 자손도 떠나서 지금은 자손이 살고 있지 않다.
그 후 1987년경에 후손들이 이장하였던 선대 묘를 다시 이장하여 전에 모셨던 곳으로 모시기로 하고 파묘(破墓)를 하였다. 파묘한 묘의 광중 외관 뚜껑을 떼었을 때 그곳 관에는 물이 연못물처럼 넘쳐나고 시신의 수의가 썩지 않고 생생하였으며, 그의 부인의 시신은 육탈도 되지 않아 얼마 되지 않은 시신처럼 나타났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에 이장하였던 곳에 다시 모시고자 광중을 지으려 땅을 팠을 때 그 전에 외관을 지었던 조선시대의 회 조각이 나와서 옛날의 묘지였던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한다.
먼 옛날 조선 명종 때에 보우대사라는 스님이 있어서 쓰러져 가는 불교를 일으켜 세우려고 궁중에 드나들었는데 유림의 지탄을 받고 제주로 유배를 갔을 때 그곳 목사가 원주변씨의 변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보우대사가 그곳에서 장살(杖殺)로 죽게 되었다. 그래서 스님이 변장을 하고는 보우의 원한을 보복하려고 주인을 속여서 명당지에 있는 원주변씨의 선대 묘를 이장케 하였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묘지 명당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모티프 분석]
「장자골 새터마을 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장자골에 조상 묘를 쓰고 번성한 원주변씨’, ‘선대 묘를 옮겨 보우대사의 원한을 푼 스님’ 등이다. 명당을 얻으면 운이 트여서 복이 온다고 믿는 민간의 의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장자골 새터마을 이야기」 가운데 잘 살던 부자마을이 선대 묘를 이장하여 몰락하는 부분은 파명당 설화이다. 얻은 명당은 잘 보존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파손되어 명당으로서의 기능을 잃게 된다.
즉, 스님의 계략에 속아 더 좋은 자리를 얻으려는 욕심에서 이장하여 파손된 경우이다. 말미의 명당을 이장하게 된 배경 이야기는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의 비호를 받다가 문정왕후 사후에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죽은 보우대사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떤 승려가 이장을 사주했다는 복수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