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15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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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奴婢-龍碑石 |
영어의미역 | Servant Created Dragon-Tombston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가산리 |
집필자 | 박명순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가산리에서 용비석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노비의 이야기.
[개설]
「노비가 만들었다는 용비석」은 이대감의 병간호를 지극정성으로 하던 젊은 노비 부부가 주인과 같이 순장을 당하고 싶지 않아서 용비석을 만들었으나 대감의 욕심으로 인하여 죽음을 모면하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상황]
1994년 진천군지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진천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옛날 턱골이란 동네에 고성이씨인 이대감이 살았다고 한다. 이대감은 마을 뒷산 중턱에 기와집을 짓고 수많은 땅과 수많은 노비를 부리며 남부럽지 않게 세도를 부리면서 행복하게 살아오다가 칠십 노령에 접어들자 병이 들어 다시는 소생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때에 열일곱 살인 노비가 막 장가를 들어 재미있게 살고 있었는데 당시 풍습에는 상전이 죽으면 장례 때 노비도 같이 순장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보아하니 대감이 죽으면 젊은 노비도 같이 죽을 판이었다. 젊은 부부는 대감마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다 하겠으니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며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빌고 또 빌었다.
두 내외의 지극한 병간호에 감동한 대감은 두 부부에게 “너희가 나의 묘 앞에 세울 비석을 6개월 안에 만들어 오되, 내 마음에 들면 너희들을 노비에서 풀어 자유롭게 살게 해주마.”라고 하였다. 두 부부는 그 이튿날로 여장을 차려 강원도로 떠나 6개월 만에 남자 노비는 귀수(貴首)와 비신(碑身)[비문을 새긴 비석의 주장이 되는 돌]을 지게에 지고, 여자 노비는 이수를 머리에 이고 대감의 집에 도착하였다.
대감이 비석을 보니 너무 훌륭해서 묘 양쪽에 세울 욕심이 생겼다. 그러다가 이수에 새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여의주를 돌려보니 여의주가 돌지 않았다. 대감은 여의주가 돌지 않으니 여의주를 돌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노비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 후 대감이 죽은 뒤에 묘 앞에 비석을 세우고 비석 앞에 노비의 묘를 썼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곳에 가 보면 대감과 노비의 묘가 아래위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티프 분석]
「노비가 만들었다는 용비석」의 주요 모티프는 ‘순장을 면하려는 노비의 희망’, ‘대감의 허욕으로 죽은 노비’ 등이다. 순장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주인을 따라서 산채로 묻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대감은 노비에게 비석을 만들어 오라고 시켰고, 노비는 그 말을 듣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죽음을 모면하려 혼신의 노력으로 훌륭한 비석을 만들어 온다. 하지만 이러한 죽음을 모면하려는 노력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비석을 두 개 씩이나 가지려 했던 이대감도 사람의 욕심 때문에 그르치게 되었으니 허욕을 부리지 말라는 교훈담을 담고 있는 어느 노비의 이야기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감의 묘 앞에 비석을 세우고 비석 앞에 노비의 묘를 썼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