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85
한자 智嚴
영어공식명칭 Jieom
이칭/별칭 미대,야로,벽송,송복생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동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64년연표보기 - 지엄, 전라북도 부안에서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492년 - 지엄, 계룡산 와초암의 조징대사에게 출가
활동 시기/일시 1508년 - 지엄, 금강산 묘길상암에서 수도
활동 시기/일시 1511년 - 지엄, 용문산에서 수도
활동 시기/일시 1513~1519년 - 지엄, 오대산·백운산·능가산 등 여러 산을 옮기며 수도
활동 시기/일시 1520년 - 지엄, 지리산에 들어가 두문불출하고 수행 정진
몰년 시기/일시 1534년 - 지엄, 지리산 수국암에서 입적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91년 - 지엄, 도원수 허종을 따라 여진 정벌에 참여
출생지 지엄 출생지 - 전라북도 부안
학교|수학지 계룡산 와초암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동학사1로 327-6[학봉리 777]
학교|수학지 금강산 묘길상암 -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 금강산 표훈사 부속 암자
학교|수학지 용문산 -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활동지 벽송암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광점길 27-177[추성리 259]지도보기
활동지 수국암 - 지리산 수국암
성격 승려
성별
대표 경력 벽송사 중창주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벽송사를 중창한 승려.

[개설]

지엄(智嚴)[1464~1534]은 전라북도 부안 출신이다. 지엄은 법명이고 당호는 벽송(碧松)이다. 본관은 여산송씨(礪山宋氏)이며, 본명은 미대(彌臺)이다. 호는 야로(埜老)이다. 아버지 송복생(宋福生)과 어머니 왕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엄의 어머니는 인도의 범승이 찾아오는 꿈을 꾸고 지엄을 출생하였다고 한다.

[활동 사항]

지엄은 어려서부터 문무를 모두 좋아하였고, 1491년(성종 22)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도원수 허종(許琮)[1434~1494]이 병사 2만 명을 이끌고 출전할 때 따라가서 공을 세웠다. 하지만 심지(心地)[마음의 본바탕]를 지키지 않고 전공을 세우는 것은 ‘허명’이라는 것을 깨닫고 28세 때인 1492년 계룡산 와초암(臥草庵)에 들어가 조징(祖澄)대사를 친견하고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연희(衍熙)에게 『능엄경』의 깊은 도리를 물었고, 그다음으로 벽계(碧溪) 정심(淨心)에게 『전등록』의 은밀한 뜻을 전수받아 억불정책 속에서도 선맥(禪脈)을 이어 갔다. 지엄이 정심에게 구법(求法)[부처의 진리를 구함]할 때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전하여진다. “지엄은 정심이 선지식(善知識)[지혜와 덕망이 있고 사람들을 교화할 만한 능력이 있는 승려]이란 소문을 듣고 찾아가 10년 동안 시봉(侍奉)[모시어 받듦]하였지만 정심이 설하는 법을 한마디도 듣지 못하였다. 지엄은 허송세월이라 여기고 하산하려 하였다. 정심은 멀리 떠나가는 지엄을 불러 ‘이놈아! 도는 받아 가거라’ 하며 허공에 주먹을 날렸다. 지엄은 그 찰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지엄은 1508년(중종 3)에 금강산 묘길상암(妙吉祥庵)에 들어가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개에는 불성이 없다[구자무불성(拘子無佛性)]’는 화두(話頭)[불교에서 참선 수행을 위한 실마리를 이르는 말]로 깨달음을 얻었고, 『고봉어록(高峯語錄)』의 ‘양재타방(颺在他方)’이란 어구에서 활연히 깨달았다. 1511년에는 용문산(龍門山), 1513년에는 오대산(五臺山)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그 후 백운산(白雲山)과 능가산(楞伽山) 등지를 행각(行脚)[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수행함]하였다.

지엄은 57세인 1520년(중종 15) 지리산(智異山)[높이 1,915.4m]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며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여 당시 최고 종장(宗匠)[경학(經學)에 밝고 글을 잘 짓는 사람]으로 후학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지엄벽송암을 창건하고,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수행하여 조선에서 간화선(看話禪)[화두(話頭)를 사용하여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선]이 뿌리내리도록 하였다. 지엄은 정심으로부터 법을 받았고, 부용(芙蓉) 영관(靈觀)[1485~1572]이 지엄의 불법을 전하였다.

1534년 겨울에 여러 문도를 지리산의 수국암(壽國庵)에 모아서 『법화경』 방편품(方便品)을 강설하다가 법랍 44세로 입적(入寂)[승려가 죽음]하였다.

[사상과 저술]

문하에는 문인 영관, 원오(圓悟), 일선(一禪)[1488~1568] 등 60~70명의 제자들이 활동하였다. 지엄은 초학자들을 지도할 때 먼저 『성원집(禪源集)』이나 『별행록(別行錄)』으로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도록 하고’[여실지견(如實知見)], 다음으로 『선요(禪要)』나 『어록』으로 ‘지식을 아는 병’[지해지병(知解之病)]’을 없애도록 지도하였다. 지엄의 저서로는 가송(歌頌) 50수를 엮은 『벽송집』 1권이 있다.

[묘소]

지엄의 제자인 숭인(崇仁)·진일(眞一) 등이 사리를 수습하여 의신(義神)의 남쪽 기슭에 봉안하였다. 나중에 의신사가 폐사되자 1798년 3월 쌍계사 서쪽 옥천 기슭으로 부도를 이안하였다. 부도의 몸돌에는 벽송당(碧松堂)이란 글귀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벽송사에는 지엄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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