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B02020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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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선빈 |
허임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허억봉은 조선이 인정한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다. 특히 그는 대금을 잘 불었다. 허억봉에 대한 찬사는 사대부의 개인문집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는 문신 정사룡(鄭士龍)[1491~1570]의 문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호음잡고(湖陰雜稿)』의 ‘허억봉의 대금 연주’라는 시에서 “재주가 여러 사람들에게 이르렀지만 자네 오직 독보적이라”고 할 정도로 허억봉을 극찬하고 있다.(『湖陰雜稿』권4 南宮日錄 許億奉弄大笒 戲書) 허억봉의 음악성은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궁중에서도 이미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본 악보인 『금합자보(琴合字譜)』의 출판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책의 서문 나와 있듯이 허억봉으로 하여금 적보를 만들게 했다(使許億鳳爲笛譜)고 적고 있는데 적보(笛譜)는 말 그대로 피리[대금]악보라는 뜻이다. 허억봉은 조선시대 음악을 관장하던 관청의 요청으로 피리에 관한 악보를 만들 정도로 궁중에서도 인정한 실력자였던 것이다.
허억봉에 관한 일화는 문신 서성(徐渻)이 지은 『약봉유고(藥峯遺稿)』의 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서성이 경상우도 관찰사로 있을 때 옛 악사 허롱을 만났는데 허롱은 허억봉을 자신의 형으로 소개하고 허억봉이 10년 동안 전악(典樂)을 한 뛰어난 악인이었다고 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허억봉이라는 성명은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광해군일기』권116 광해군 9년 6월 갑인조에는 허억복(許億福)으로 되어 있는데, 『광해군일기』권176 광해군 14년 4월 신미조에는 허억봉(許億逢)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당시 사대부의 문집에는 주로 허억봉(許億鳳)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족보상에는 허락(許珞)으로 되어 있어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당시 노비이름을 한자로 음차(音借)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허억봉의 아들이 허임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허임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조선 중기의 문신 태천 민인백(閔仁伯)[1552~1626]의 문집 『태천집(苔泉集)』에는 허억봉을 허임의 아버지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조선 최고의 악사였고, 그 아들은 조선 최고의 침의였다는 얘기가 된다. 부자가 신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각기 다른 분야에서 조선 최고의 명예를 얻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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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산리 - 악사 허억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