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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양과 이목」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1968
한자 寶壤-梨木
이칭/별칭 이목소와 이무기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박유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285년 - 「보양과 이목」 『삼국유사』에 수록
관련 지명 운문사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지도보기
성격 설화|창사 설화
주요 등장 인물 보양|이목|천제|천사
모티프 유형 창사(創寺)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전해 내려오는 운문사보양에 대한 이야기.

[개설]

「보양과 이목」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있는 운문사(雲門寺)가 세워진 유래이다. 운문사에 머물던 국사(國師) 보양(寶壤)과, 보양을 도왔던 서해 용왕의 아들 이목(璃目), 배나무[梨木]에 대한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고려 시대 일연(一然)이 편찬한 『삼국유사(三國遺事)』「보양 이목(寶壤梨木)」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

보양이 중국에서 불법을 배워 돌아오는 길에 서해 중간쯤에 이르자 용이 나타나 보양을 용궁으로 맞아들였다. 서해 용왕은 보양에게 불경을 외우게 하더니 금빛의 비단 가사 한 벌을 주고, 아들 이목도 함께 보냈다. 용왕은 지금 삼국이 시끄러워 불법에 귀의한 임금이 없으나, 만일 자신의 아들과 더불어 본국으로 돌아가서 작갑(鵲岬)에 절을 짓고 지내면 능히 적을 피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몇 해 후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보양이 고국으로 돌아와 어떤 골짜기에 다다르자 갑자기 늙은 중이 스스로를 원광(圓光)이라 하면서 도장이 든 상자를 주고 사라졌다. 원광은 신라 시대 이 골짜기에 다섯 갑사(岬寺)를 중창한 승려였다. 이에 보양은 그 골짜기가 전대의 절터라는 것을 깨닫고 절을 지은 뒤 이름을 작갑사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고려 태조(太祖)가 삼국을 통일하였다. 태조작갑사에 다섯 갑사의 밭 500결(結)을 이 절에 바친 뒤 937년 운문선사라는 절 이름을 내리고 가사의 신령스러운 음덕을 받들게 하였다.

서해 용왕의 아들 이목(璃目)은 항상 절 곁에 있는 작은 못에서 살며 법화를 음으로 도왔다. 어느 해에 몹시 가물어 밭의 채소가 모두 타서 마르게 되자 보양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였다. 천제가 비를 내리게 한 이목을 죽이려고 사자를 보냈으나 보양이 배나무[이목(梨木)]를 이목이라 속여 이목을 구했다. 사자가 돌아간 뒤 이목은 부러진 배나무를 어루만져 다시 살아나게 하였다.

[모티프 분석]

주요 모티프는 ‘절의 창건’, ‘이목의 신이한 행적’이다. 이와 동일한 전승으로 보이는 「이목소와 이무기」에는 ‘이목의 신이한 행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보양과 이목」에는 ‘절의 창건’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는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이 불교적 관점으로 이 설화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생긴 차이점이라고 추측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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