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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1146
한자 尹炳采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1년연표보기 - 윤병채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5년 - 윤병채 아버지 윤상에게 한문 배움
수학 시기/일시 1915년 - 윤병채 윤영섭 아래에서 배움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윤병채 운문면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4년 1월 - 윤병채 다물단원 서동일에게 군자금을 제공
활동 시기/일시 1925년 6월 - 윤병채 서동일과 함께 경찰에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26년 3월 31일 - 윤병채 무죄 판결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윤병채 사망
출생지 윤병채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 707번지지도보기
활동지 윤병채 활동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독립 만세 운동 참여|다물 단원에게 군자금 제공

[정의]

일제 강점기 청도 출신의 독립 운동가.

[개설]

윤병채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 707번지에 출생하였다. 1919년 3·1 운동운문면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고, 1924년 1월, 다물단의 단원 서동일(徐東日)에게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본관은 파평(坡坪) 충경공파. 윤병일(尹炳馹)의 동생이다. 1905년부터 1915년까지 아버지 성균관 진사 윤상일(尹相一)에게 한문을 배웠으며, 1915년부터 1920년까지 윤영섭(尹瑛燮) 아래에서 공부했다. 16세에 같은 마을에 거주하던 종조할아버지이자 1,700석 부자인 윤상렴(尹相濂)에게 입양되었다.

[활동 사항]

윤병채(尹炳采)[1901∼1962]는 1919년 3월 18일 와세다 대학에 유학 중이던 형 윤병림(尹炳林)과 함께 청도군 운문면 신원동(新院洞) 청년들과 면사무소에 모여 깃발을 만들고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왕래하면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윤병림은 이때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을 받은 뒤, 고문과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2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3·1 운동에 함께 참여했던 윤병채는 피신하여 몸을 보전하였다.

1924년 1월 공암리에서, 중국 북경에서 국민당원 남형우와 배천택 등이 조직한 다물단의 단원 서동일을 만나 군자금 모집 방안을 협의하고 양가 백형수인 이여심(李女心)을 비롯한 지역의 자본가들에게 군자금을 제공받아 서동일에게 1,000원을 전달하였으며, 1925년 1월 다시 서동일에게 군자금 30원을 전달하였다. 또 같은 해 5월 청도역에서 서동일에게 군자금 모금 여비 5원을 전해주었다.

1925년 6월 서동일 등과 함께 경찰에 체포된 뒤 6월 검찰에 넘겨져, 1925년 12월 28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예심을 거쳐, 1926년 3월 31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윤병채가 당시 친부 및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600석 규모의 재산을 모두 군자금으로 헌납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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