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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 대한 청년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94
한자 大韓靑年團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49년 12월 19일 - 대한 청년단 조직
해체 시기/일시 1953년 9월 10일 - 대한 청년단 해체
최초 설립지 대한 청년단 - 경상북도 청도군
성격 우익 청년 단체
설립자 김준태

[정의]

1948년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 활동한 청년 단체.

[개설]

1948년 5·10 총선거를 통해 단독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이후 남로당 저항, 여순 사건, 제주도 4·3 사건, 정부 내 정치 투쟁 등 일련의 불안한 정국이 이어졌다. 이러한 정국을 타파하기 위하여 이승만 정부는 국가 보안법을 제정하고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섬멸을 통하여 정권의 안정화와 완전한 반공 국가 수립을 모색하였다. 이승만의 지시에 의해 1949년 12월 19일에 조직된 대한 청년단은 바로 그러한 목적 달성의 전위대 역할을 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이다.

[설립 목적]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우익계 단체가 조직된 것은 미군정 부대가 청도군청을 접수했던 1945년 10월부터이다. 청도군 대한 청년단은 1949년 12월 19일에 조직된 대한 청년단의 설립 목적에 따라 좌익 세력 섬멸 및 반공 국가 수립을 위해 설립[초대 단장 김준태]되었다.

[변천]

1951년 1월 대한 청년단 간부들이 연루된 국민 방위군 사건으로 방위군이 해산되고 주요 간부가 처형되면서 활동은 침체되었다. 이후 재건하려고 노력했으나, 1952년 8월 제2대 대통령 선거 이후 내분이 격화되어 1953년 9월 10일에 해체되는데 청도군 대한 청년단도 이때 해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청도군 대한 청년단은 해방 정국과 6·25 전쟁 중 청도 지역 좌익 세력 제거에 앞장을 섰던 단체이다.

6·25 전쟁 발발 직후 전선 후방을 교란할 소지가 있는 잠재적 적 제거 차원에서 청도군에서도 국민 보도 연맹에 가입한 자와빨치산에 협조 혐의가 있는 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예비 검속이 9월 중순경까지 이어졌다.

이때 청도군 대한 청년단에서는 부역자 및 좌익분자 색출을 위하여 그 대상자를 직접 방문하여 강제로 연행한 뒤 청도 경찰서, 청도 국민학교, 소방 창고, 김명옥 가택 등에 분산 구금하고 군경들과 함께 청도 용각산 곰티재, 승학골, 경산 평산동 폐코발트 광산으로 이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대한 청년단 단장으로 활동했던 이권우도 보도 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1950년 7월에 각북 지서로 출두하여 대구 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살해당하였다.

[현황]

청도군 대한 청년단 역대 단장은 김준태(金濬泰)·김석봉(金石峰)·배종희(裵鍾禧)였으며, 그 외 간부는 김보현(金潽鉉)·문병태(文炳泰)·임정규(林定奎)·김상달(金祥達)·반재현(潘在鉉) 등이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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